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하는 제53차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정세미)의 강연이 2015년 6월 22일(월) 저녁 8시 전민동성당 2층 성전에서 진행되었다. 강연자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으로도 유명한 홍세화 님이고, 강연을 듣기 위해 약 200명 남짓한 분들이 참석하였다.
2015-6-22(월) 저녁 8시, 대전 전민동 성당
홍세화 특강 <민주주의와 시민의식> (1)
국민의 수준을 뛰어넘는 정부는 없다
장발장 은행을 아십니까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장발장 은행 이사장이기도 합니다. 장발장 은행에 대해서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우리나라에는 한 해 4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벌금 낼 돈이 없어서 감옥에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분들에게 돈을 대출해주는 은행입니다. 이자도 없고 아무 것도 없이요.
장발장, 국회에 가다
지난 6월 4일 ‘장발장, 국회에 가다’라는 청원행사가 있었습니다. 국회에서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벌금형에는 집행유예가 없습니다. 모순이죠. 벌금형보다 무거운 것이 징역형인데, 징역형에는 집행유예가 있어서 예를 들어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라고 하면 그냥 풀려나오죠. 그런데 징역형보다 훨씬 가벼운 벌금형은, ‘벌금 200만원’이라면 가난한 이는 그 돈이 없어서 결국 오히려 감옥에 가야 합니다.
벌금형에도 ‘집행유예’가 필요한 이유
이러한 모순적 상황이 있어서 저희가 (1) 벌금형에도 집행유예를 해달라는 것과, (2) 벌금형을 받으면 30일 이내에 납부를 해야 하는 데 이것을 분납으로 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과, 또한 (3) 일수 벌금제를 해달라는 요구를 하는 겁니다.
총액벌금제(한국)와 일수벌금제(유럽의 나라들)에 대해서
지금 한국은 알바생이건 아주 돈이 많은 사람이건, 예를 들어 과속을 했으면, 과태료나 벌금이 똑같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경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재산과 소득에 따라서 벌금액이 다릅니다. 독일은 5천배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똑 같은 금액을 내는 것은 형평성이 맞지 않아서 유럽의 벌금제처럼 하자는 겁니다.
20키로 이상 속도위반 벌금이 1억3천만원
가령 핀란드의 노키아라는 큰 회사 부회장이 오토바이를 타다가 60키로 속도제한을 20키로 이상 과속해서 80키로 이상으로 달렸는데, 그 사람에게 판사가 내린 과태료는 우리 돈으로 1억 3천만원입니다. 그렇게 재산과 소득에 따라 벌금을 달리하는 것까지 요청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염수정 추기경이 일일 은행장이 된 까닭은?
그날(6/4) 바로 염수정 추기경께서 (은행 출범 100일 기념으로) 일일 장발장 은행장으로 같이 도와주셨고, 6월 4일 (국회의원 회관에서 열린 장발장 은행 개업식, ‘국회로 간 장발장’) 행사에 여야 국회의원들이 많이 참여해주었기 때문에 일정부분 제도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이 왜 은행이름일까?
지금 장발장 은행의 ‘장발장’은 여러분이 아시겠지만,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주인공으로 장발장은 19년간 감옥생활을 하고 나와서 거의 모든 곳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는데, (디뉴 Digne 교구의) 미리엘 주교님의 거처에서 하룻밤에 묵게 되잖습니까?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은수저(은식기)를 갖고 도망쳤죠.
미리엘 주교님, “나는 당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바치려는 것”
그래서 경찰에게 붙들려서 다시 오니까, 미리엘 주교께서 뭐라고 하시냐면, “내가 은촛대도 줬는데, 그건 왜 안가져갔냐?”고 하시니까, 은수저를 도둑질해서 붙잡혀온 장발장인데, 미리엘 주교가 그야말로 은촛대도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영혼을 갖겠다.” 이런 표현을 합니다.
‘장발장 은행’이 하려는 일
저희가 장발장 은행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도 그렇고, 우리 은행이 하려는 일도 그 작품에서 하신 말씀, 바로 “당신의 영혼을 사겠다”라는 것이 오늘 가난해서 잘못을 저질러서 벌금형을 받았는데, 돈이 없어서 감옥으로 가야하는 현실에서, 국가는 징벌제로, 사회는 냉대와 무관심으로 사람들을 대할 때, 그야말로 사회가 따뜻한 손길로 다가가는 것 자체가 그 분들에게 삶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란 바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장발장 은행 최종목적은 은행 문 닫는 것?
우선 제도가 빨리 바뀌어서 장발장 은행의 문을 닫는 것이 목적입니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계시겠지만, 빨리 문닫을 때까지 관심 가져주시고 참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터넷에서 ‘장발장 은행’ 치면 바로 나오니까 관심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오늘 (전민동성당 특강)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지금도 제11차 심사위원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워낙 신청하신 분들은 많고 재원은 한정되어 있어서 참으로 곤혹스럽니다. 그래서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 보다는 신청하신 분들에 대한 형평성, 그리고 모든 분들이 다 절박하시지만 더욱 더 절박하신 분들을 선정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
프랑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 아베 피에르 신부
사진설명. 프랑스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는 아베 피에르 신부님이고 2위가 축구영웅 지네딘 지단이다.
제가 프랑스에서 20년을 살았는데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프랑스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은 분이 아베 피에르(1912~2007) 신부님이셨습니다. 워낙 프랑스는 3분의 2의 종교가 가톨릭이기도 합니다만, 아베 피에르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굳이 둘로 나눠야한다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눠진다.” 이런 말씀이 기억납니다.
브라질의 까마라 주교는 빨갱이인가?
사진설명. 남미 브라질의 주교 까마라.(1909~1999)
그리고 또 남미(브라질)의 주교님 돔 헬더 까마라(1909~1999). 이 분은 그야말로 “그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할 때에는 사람들이 나를 성자라고 부르더니, 내가 가난의 이유를 묻고 가난의 근거를 뿌리뽑아야 된다고 말하니까 사람들이 나를 빨갱이라고 부르더라.”라는 말도 느닷없이 생각납니다.
고결함과 섬세함의 끝판왕, 프란치스코 교황
그리고 작년 여름이었죠. 교황님께서 오셨을 때 저는 한국에서 그 어떤 사람에게서 이 말이 오류가 있겠지만, 어떤 고결함과 섬세함을 참 느끼기 어려웠는데, 프란치스코 교종(혹은) 교황님을 뵈면서 고결함과 섬세함을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진. 프란치스코 교황은 4박5일간의 일정으로 2014년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우리나라를 사목방문하신 바 있다. 사진은 지난해 8월 16일(토, 방한 3일째) 광화문광장의 124위 시복식 미사현장에서 세월호 사건으로 딸을 잃은 김영오 씨가 건네는 편지를 직접 받아드는 모습이다. 교황은 이 편지를 다른 이(경호원)에게 건네지 않고, 직접 자신의 주머니에 넣으면서 고이 간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늘의 주제 '민주주의와 시민의식'
네. 서론이 길었습니다. 제가 오늘 주제인 <민주주의와 시민의식>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저는 민주주의가 성숙하려면 민(民), 우리가 성숙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의미에서부터 출발할 것 같아요. 민주주의, 바로 민(民)이죠. 민주(民主), 곧 백성의 주인의식이 있는 만큼 민주주의는 성숙될 수 있다. 이것은 알렉시스 토크빌(1805~1859)이라는 프랑스의 정치학자이자 역사학자입니다.
“국민의 수준을 뛰어넘는 정부는 없다.”
사진설명. 알렉시스 드 토크빌(19세기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19세기 사람이니까요, 벌써 한 세기 반 전의 사람입니다. 이 분의 말은 정부의 수준은 국민 수준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 정부가 어떤 모습이든 그것은 대한민국 국민들, 한국사회 구성원들 수준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말씀을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뭔가를 잘해야 한다는 것보다는, 제 관심은, 백성들, 우리 민(民), 사람들의 의식수준이고 사회문화적 소양의 수준이고, 비판의식의 수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 부분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잡초를 없앨 궁리만 하지 아무도 뽑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실 한국사회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바라볼 때, 참 개탄을 합니다. 대체로 개탄을 하지만, 지금은 어울리지 않는 격언이겠지만, ‘생태적 관점’이 없을 때에 쓰여지는 것으로, ‘잡초’라는 말이 오로지 부정적 의미로만 쓰일 때의 격언입니다. “잡초를 없앨 수는 없지만 뽑을 수는 있다.”라는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잡초를 없앨 궁리만 할 뿐, 잡초를 아무도 뽑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세상은 온통 잡초같이 되고,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은 잡초같다!’고 개탄만 하지 아무도 잡초를 뽑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물론 제가 ‘잡초는 없앨 수 없지만 뽑을 수는 있다.’라는 표현에서 끌어와서 비유적 표현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제 자신에게도 그런 모습을 봅니다.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하는 제53차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정세미)의 강연이 2015년 6월 22일(월) 저녁 8시 전민동성당 2층 성전에서 진행되었다. 강연자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으로도 유명한 홍세화 님이고, 강연을 듣기 위해 약 200명 남짓한 분들이 참석하였다.
내 자신의 의식 지형을 돌아보라
한국사회에 대해서 여러가지 몰상식과 불의와 비양심적인 뻔뻔함이 난무하고 있을 때에 실제로 개탄하고 그런 글도 쓰고 있지만, 과연 제가 얼마만큼 이웃과 주변사람들에게 실제적으로 다가가 설득하고 있고 그분들의 수준을 고양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서 가까운 이들을 설득하고 있는가, 이런 점에서 잘 안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해석할 뿐,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게 우리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이 자리에 계신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주제는 우리 자신의 의식 지형에 대한 것입니다. 그걸 통하여 어떤 어려움과 문제가 있고, 나 자신부터 성찰하기 위한 측면에서도 제가 가장 먼저 던지고 싶은 질문은 “내 생각의 지형은 어떻게 내가 갖고 있을까라는 물음”입니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제가 이 질문을 던진 것은 우선 한국사회가 한국 사회구성원의 의식지형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가 왜 한국사회인가? 바로 우리들,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한국 정치란 한국사회 구성원인 우리들의 정치의식, 정치에 대한 생각의 반영입니다. 한국의 인권의식이란 우리들의 인권에 대한 생각의 반영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사회란 우리들 구성원의 인식과 인식체계의 총체적 반영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가진 생각들은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니까 지금 어떻게 어떤 생각들을 갖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을 갖고 태어나는 건 아니다
이 질문은 어렵지 않습니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지만, 생각을 갖고 태어나진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이 내 삶을 지배하는 데 그 생각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실상 이것은 생각하는 사람의 출발점입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동물인데, 생각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은 어떻게 내가 갖고 있는 것일까?” 바로 이 질문을 던져야지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논리적 비약일 수 있지만, 한번 따져보면,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지만, 생각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데, 내 삶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생각입니다.
지금 나의 생각이 내 삶을 지배한다.
생각 안에는 정리되어 있거나 정리되어 있지 않거나, 인생관, 세계관, 그리고 가치관이 거기에 담겨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삶을 지배하고, 내 삶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를 규정하게 되는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을 어떻게 내가 가지게 되었을까?”에 대한 물음은 내 삶을 성찰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또한 생각하는 사람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열심히 살아오셨는데, 지금까지 이러한 질문과 마주친 적이 있는가? 똑 같은 것은 아니라도 유사한 질문이라도 던진 적이 있는지? 아니면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없다면, 감히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지금까지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아오시지 않은 겁니다.”
당신은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까?
이것이 지나친 말씀일까요? 전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삶을 지배하는 것이 내 생각인데, 그 생각을 갖고 태어나질 않았는데, 내가 지금 어떻게 그 생각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 그리고 그 물음에 통한 사유를 하지 않은 채 살아왔다면 어떻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겁니다. 이 문제가 실상 한국사회 시민의식과 민주적 의식의 토대에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나는 고집한다, 고로 존재한다
우선 저는 한국사회 대다수 구성원이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하는사람이 아니라 ‘다만 고집하는 사람’이라고 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 같이 한번 따져보겠습니다.
코기토 에르고 줌 (Cogito, ergosum) 느닷없이 라틴어가 나왔습니다만, 바로 데카르트(1596~1650)의 유명한 17세기의 명제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이 17세기에 중세적 인간관과 구분되는 근대적 인간관을 표현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우리는 암기위주의 공부를 하기 때문에, 데카르트가 이 말을 했다는 건 압니다. 그러나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이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놓고 잠시만 생각해도 끊임없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사진설명. 르네 데카르트(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내가 누구인지 쉽게 말할 수 있나?
나는 누구일까요? 쉽게 말할 수 있습니까? 또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또 존재한다는 건 또 무엇일까요? 이런 면에서 실제로 생각하는 경우에 ‘생각한다’는 실상에 의문을 품게 된다. 즉 ‘회의한다’를 필수적으로 낳게 됩니다. 의문을 품는 다는 겁니다. 그래서 서양철학에서 ‘코기토 에르고 줌’은 바로 회의론(懷疑論)을 낳게 됩니다. 그래서 ‘회의론’때문에 합리주의 철학이 배태된다는 걸 보편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실제로 생각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회의(懷疑)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암기할 뿐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의할 줄 모르고, 바로 여기서 문제되는 게 스피노자라는 17세기의 탁월한 인문학자가 말한 ‘생각의 성질’니다.
스피노자가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이유
스피노자(1632~1677)는 네델란드이면서 유태인이었는데, 유태인 사회에서 배척되고 완전 고립된 삶에서 렌즈(안경)알을 깍는 고된 노동을 하며 철학을 했던 인물입니다. 많은 이들이 스피노자의 유명한 말을 알고 있습니다. “내일 세상이 망하더라도 난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 이 말의 주인공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고, 미래를 전망하는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가장 소중한 시간인 ‘지금’, 바로 오늘을 불성실하게 살도록 한다는 겁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오늘의 불성실을 낳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미래가 불확실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어진다고 상정하고, 내일 세상이 사라지고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는 성실성으로 오늘을 연속적으로 살라는 명언을 남기신 겁니다.
사진설명. 스피노자 ... 그리 길지 않은 45년 인생을 힘겹게 살았다
스피노자의 ‘생각의 성질’이란 무엇?
스피노자는 바로 데카르트의 말을 이어받아서,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인데, 하나의 생각을 갖게 되었을 때, 의식세계 안에 담게 되었을 때 그 생각자체가 갖는 성질이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생각의 성질이 ‘고집’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나 어떤 생각을 하게되었을 때, 그 생각을 고집한다는 겁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자신이 가진 생각을 고집합니다. 그것은 어떤 특수한 성질이 아니라, 생각 자체가 가진 성질입니다.
‘고집’은 생각 자체가 가진 성질이다
스피노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사람은 한번 형성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진 생각을 끌어안고 고집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생각의 성질은 고집인데, 한편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회의할 줄 아는데, 우리처럼 생각하지 않고 암기만 하면, 회의할 줄 모르고 오로지 고집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고집이 막무가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이른바 ‘설득’이란 단어가 있지만 설득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설득해도 안되는 겁니다. 이것이 아주 심각합니다.
생각 자체에 대해서 겸손해야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생각을 고집할 뿐, 그 ‘생각’에 대해서 겸손하지 않고 ‘회의’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다른 이를 설득해도 설득이 되지 않는다는 경험을 갖게 되고, 그래서 설득을 아예 표기한 사회가 된 겁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이 마치 존재의 완성단계인 양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가령 부부간에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모든 사안에 대해 의견이 같습니까? 그렇지 않죠. 의견이 다를 때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서로 다른 의견을 겸손하게 “나는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우린 왜 이렇게 생각이 다를까요?” 정말 그렇게 풀어내서 생각이 모아지도록 노력하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고 계시나요? (네!)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그러자 교중에서 한 분(여)이 자신있게 “네”라고 답변하자 좌중에서 웃음이 크게 터져나왔다.)
그냥 덮고 지나가는 게 우리 모습?
정말 바람직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부부들이 보이는 모습은 생각이 다른 모습을 보이면 묻어두고 침묵으로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남편은 남편대로, 부인은 부인대로 자기 생각을 끝까지 주장할 뿐, 평행선을 달리니까 결국 그 얘기를 해봐야 나오는 건 합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말다툼이 됩니다. 다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냥 덮고 지나가는 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왜 이렇게 자신만만해졌을까요?
결국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부부 사이, 가장 가까운 사이로, 같이 살고, 아이를 낳고 살고, 특히 사회경제적 처지가 동일체인 부부간에 그렇게 이른바 계급적 처지가 동일체인 부부간에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열린 자세와 겸손함으로 대화와 토론을 하여 생각이 같아지는 기쁨을 향유하고 느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어떻게 부부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같이 하여 그런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 부모의 생각을, 자식의 생각을, 형제의 생각을, 과연 누구의 생각을, 이웃의 생각을 … 결국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워낙 의식의 주체가 각자이기 때문에 애당초 고립된 상태로 살아갑니다. 아무리 제도로 묶여있어도 궁극적으로 인간은 고립된 존재이지만, 고립된 존재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이 있을 때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겸손하다는 것이다
사진설명. 고대 희랍(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900년 가량 잊혀졌다가 12세기에 이르러
아랍 철학자의 소개 덕분에 서양철학사에서 부활한 인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도 “가장 돈독한 인간관계는 세상을 같이 바라볼 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세상을 달리 보더라도 대화와 설득, 양보와 겸손된 자세로 출발된 합의과정을 갖게 될 때, 인간관계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는데, 전혀 그러지 못해서 더욱 더 외롭게 살 수 밖에 없고, 이렇게 외롭게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 기대는 것이 바로 소유입니다. 더 많이 갖고 소유하려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이 문제, 소유의 문제를 말하면서 우선 생각하고 싶은 것은 민주적인 시민의식이라고 할 때 바로 ‘겸손’의 문제, 내 생각에 대한 ‘겸손’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게 바로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회의’하는 것, 실제로 생각하는 과정이 없이, 입력된 생각만 갖고 있는 우리 모습이 낳게 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관계도 어려워지고 사회도 어려워집니다.
왜 사회 ‘운동’이고 인권 ‘운동’인가?
부부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지만, 사회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우린 모두 ‘운동’이라고 부를까요?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권운동, 사회운동, 교육운동 등 모든 게 운동입니다. 운동은 바로 3개의 축으로 이루어집니다. 우선 같이 세상을 움직여야 할 사람들이 같은 뜻,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힘을 합치는 겁니다. 그래서 조직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학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조직에 참여한 내 자신부터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이웃을 설득해야 합니다. 이웃을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전홍보가 있습니다.
모든 사회운동체에는 교육, 선전, 홍보의 3대 요소가 필요하다
그래서 모든 사회운동체에는 조직부, 조직실 같은 것이 있고, 작은 사회운동체에도 교섭부라고 있습니다. 즉 교육선전부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운동의 기본 3개 축으로 우리의 경우 바로 조직만 남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육, 선전, 홍보가 이뤄져야 하는데, 선전과 홍보는 각자 다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데, 선전홍보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죠. 남편이 아내를 설득하지 않고, 아내가 남편을 설득하지 않는데, 과연 누굴 설득하겠습니까? 그래서 선전과 홍보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남을 설득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 자신도 설득대상이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 또한 학습하지 않습니다.
조직 이기주의에 빠지는 이유
결국 그래서 사회운동체에서 조직만 남습니다. 그래서 조직이기주의에 빠지고, 조직 내 알량한 권력을 갖고 다투고 정파로 싸우고 이런 면만 남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실제로 학습하고 선전 홍보가 원활하게 이뤄지며 운동이 건강성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안으로 꼬이는 것이 그런 결과를 낳고 있고, 이것이 진보정치이든, 노동지형이든 당면해 있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1차적으로 사유하지 않은 채 갖고 있는 생각의 세계의 문제라는 겁니다.
인간은 몸과 의식으로 구성
가령 쉽게 생각해보면, 사람의 삶은 몸과 생각으로 둘로 나눠볼 때, 혹은 ‘정신과 육체’라고도 얘기하는데, 조금 왜곡될 수 있겠지만 ‘몸과 의식’으로 나눠서 삶이 구성된다고 보았을 때, 당연히 각자의 삶은 소중합니다. 그래서 건강해야 하고, 생각은 주체적이고 온유하고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하는데, 그래야 내 삶이 주인인 삶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할 때, 그런 목표를 갖고 있는데, 반대상황을 한번 상정해보면, 건강해야 하는 데 건강하지 않다면, 아픔이 일어납니다. 메르스가 골치아픈 것은 ‘잠복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프면 찾아오는 자각증세
아무튼 건강해야 하는 데 건강하지 않다면, 바로 통증이 오고 열이 옵니다. 통증과 열. 우리가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이 물어보는 말이 있습니다. 전문가인 의사가 거꾸로 환자인 우리에게 물어봅니다. “어디가 아파서 왔습니까?” 무엇을 물어보는 것이냐면 바로 자각증세를 말하는 겁니다. 대부분 자각증세가 있고, 치료과정을 거쳐 건강한 상태로 돌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병이 고약한 ‘암’과 같은 겁니다. 자각증세가 너무 늦게 옵니다. 몸이 망가진 뒤에 진단을 받으면 이미 늦어진 경우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우, 통증과 열이 와서 자각증세를 통해 다시 건강한 상태로 돌아갈 길이 열려 있다는 겁니다.
생각도 아프면 자각증세가 있을까?
그렇다면 내 생각은 어떻습니까? 주체적이고 온유해야 하는 생각이 그렇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가 한 말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생각의 성질을 고집이라고 했습니다. 생각이 주체적이거나 온유하지 않은 노예적 상태를 고집해야 한다는 겁니다.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하는 제53차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정세미)의 강연이 2015년 6월 22일(월) 저녁 8시 전민동성당 2층 성전에서 진행되었다. 강연자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으로도 유명한 홍세화 님이고, 강연을 듣기 위해 약 200명 남짓한 분들이 참석하였다.
생각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이 점에서 우린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생각, 내가 고집하는 생각을 어떻게 내가 갖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바로 그 물음이 생각하는 사람의 출발점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일종의 순환적인 게 있겠지만 한국사회의 대다수는 지금까지 이 질문,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을까라는 질문도 제대로 던진 적이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그 만큼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점에서,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고 있다는 뜻이고, 자신이 가진 생각에 겸손하지 않다는 뜻이고, 지금 가진 생각에 대해서 그야말로 주체적인지 온유한지에 관계없이, 지금 가진 생각을 고집하는 현실이 실상이 아니겠는가?라는 겁니다.
우리는 과연 저마다 생각을 창조하는 사상가인가?
그런 점에서 제가 질문을 던진다면, 그렇다면 지금 갖고 계신 생각,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막무가내로 고집하는 생각, 내 삶을 지배하는 내가 가진 생각, 갖고 태어난 게 아닌데, 그렇다면 여러분이 창조하셨습니까? 우리는 사상가입니까? 우리가 사상을 창조할 능력을 갖고 있습니까? 어떻습니까? 1, 2, 3, 4 네 가지 생각 중에 한가지 생각을 가질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질문에 대해서도 한국사회 구성원은 정당하게 답변할 처지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 민주주의와 시민사회를 받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인 동시에 가장 큰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2부에서 계속)
제 53차 정세미 미사와 강연
2015년 상반기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
일시 : 6. 22(월) 19:00 미사 / 20:00 강연
강사 : 홍세화 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
주제 : 민주주의와 시민의식
장소 : 전민동 성당
주최 :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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