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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강론과글

[20150416] 원주교구 신우식 신부, 세월호 1주기 추모미사 강론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6. 12. 26.

2015년 4월 16일

원주교구 신우식 신부, 세월호 1주기 추모미사 강론

 

원주교구 복음화사목국장 신우식 토마스 신부

 


우리는 출생이후 인생이라는 여정을 걸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나약하여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어려서부터 자신이 스스로 독립할 때까지 혼자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공동체성은 우리의 여정 안에서 가장 필요한 정신이며 근본적인 토대입니다. 특히 우리 신앙인들은 세례를 통해 주님과 함께 사는 문으로 들어왔고, 순례의 교회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바닷물은 죽음을 상징하며 이 바닷물은 십자가의 신비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아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든 그렇지 않든 현세생활의 여정을 통과하면서 인간은 어떠한 모양으로든 머나먼 고통의 길을 걷고 있으며, 이 길에서 우리 교회는 언제나 인간을 만나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1년 전 참혹하고 끔찍한 사건인 세월호에서 죽어간 많은 영혼들을 위한 이 추모미사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세월호의 희생된 어린 영혼들, 그들의 선생님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이웃으로 있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이들 또 선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희생으로 많은 이들을 살린 이들, 반대로 그 사건을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마치 도망치듯 빠져나간 불쌍한 사람들,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하나도 제대로 하지도 못한 무능력한 책임자들과 이런 사건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불행한 자들. 이런 많은 사람들 안에서 우리는 하나의 단어를 발견합니다.

 

고통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교회는 인간의 고통의 길에서 인간을 만나려고 노력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이 만남 속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할 길이 되는” 것이며, 이 길은 가장 중요한 길의 하나인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종류이든 악을 경험할 때마다 고통을 겪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어휘는 고통과 악이 서로 일치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고통 받고 있는 모든 것을 “악”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인간이 악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 것은, 악이란 선의 어떤 결핍이나 제한 또는 왜곡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가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로부터 단절되어있는, 또는 자기가 박탈당하게 된, 그런 선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년 전의 세월호의 참사이후 295명의 소중한 생명이 목숨을 잃고 9명이 실종된 이 엄청난 참사 앞에서 우리는 사회적 고통을 함께 느끼고 있습니다. 언제쯤 이 고통이 끝날 수 있을까? 고통이란 연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적 고통은 우리에게 멈추어버린 시간을 살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세월호를 통해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세월호를 통해 희생자들에게 대한 미안함의 고통이며, 지켜주지 못한 사회적 공동책임자로서의 고통이고 또 세월호 이전과 이후가 달라지지 않은 것에 대한, 무관심과 경직된 이기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고통입니다. 물론 세월호 희생자들의 가족들은 그들과 함께 한 추억으로 아파합니다. 함께 걷기도하고, 울기도 하고 가족이 함께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며, 아들이 좋아하는 비빔밥을 만들어 서로 웃어가며 먹던 그 추억으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유가족들과 9명의 실종자 가족들이 말하듯 사랑하기에 힘듭니다. 사랑은 힘든 것이 아닌 줄 알았는데 사랑하였기에 힘이 듭니다.

 

“비맞음 감기온다. 오케이 엄마 내가 말 못할까봐 보내 놓는다. 사랑해”

“진짜 사랑해, 우리 진짜 죽을 것 같애, 얘들아 진짜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다 용서해줘, 사랑한다”

“많이 사랑해주지 못해 미안해”

 

이 고통의 무게 앞에서 우리는 가슴이 아픕니다. 이 말로 우리는 눈물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자문해 봅니다. 이 시간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하나로 이끌어 줄 것이며 이 사랑은 우리의 고통의 무게를 내려놓게 할 것입니다.

 

사랑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준 이 사랑이야 말로 인간이 인간을 통해 만난 고통 앞에서 자유롭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추상적이지 않고 관능적이지 않습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께서 말씀과 행함으로 표현 하셨듯 우리에게 실천을 통해 사랑을 배울 수 있고 알 수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그 시작은 그들을 위한 진정한 기도입니다.저는 작년 2014년 4월 16일을 기억합니다. 저는 파도바의 산 까를로 본당에서 성주간 고해신부로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한국에 큰일이 났다고 저에게 말하면서 저는 이 참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외국에 있으면서 이 고통의 깊이를 알지 못했는데 본당 신부님은 기쁨의 부활절 성야미사에서 보편지향 기도를 바치며 토마스 신부의 고국의 슬픔을 애도하며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하였습니다. 몇 분간의 침묵기도 속에서 이태리 본당의 신자들은 생면부지의 먼 나라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이 기도가 하느님께 다다랐을까요?

 

이스가리옷 유다가 배반하여 친구를 버리고 은전 30냥에 팔아넘기듯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통해 물질주의로 극에 달한 한국 사회를 봅니다. 그 사회는 바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과 이 고통 속에서 함께 만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선한 마음으로 이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아닌 것은 아직 우리 사회에 만연한 탐욕과 이기심, 불신과 생명 경시 풍조가 우리 사회 곳곳에 있기 때문이며 이것을 이용하려는 불행자들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다시 돌아가서 지내고 싶은 순수한 시절,

 

우리의 진실한 기도는 주님의 마음에 드실 것이고, 우리의 진정한 기도는 온 국민의 희망과 함께 진도 앞바다의 밑바닥 어두운 곳에 침몰한 배 한척을 끌어 올리고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진실을 영원히 감옥과 같은 바다 속에 감출 수는 없습니다.

 

이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 느껴지는 또 다른 한 가지는 바로 부끄러움입니다.

그것은 바다 건너 먼 곳에 있었던 교황님도 세월호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 땅에서 세월호는 희미한 기억으로 잊혀져가고 있는 것과 같고 잠시 감정적인 적선을 하여 눈물 한 방울 흘리고, 또 이 참사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강하게 주장만 하려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죄는 부끄러움을 가지게 합니다. 아담은 죄를 지은 다음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자신이 알몸인 것을 느끼고, 자기가 저지른 일의 무게를 깨닫습니다.

 

이 부끄러움은 세월호를 통해 민낯처럼 드러난 우리들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법과 정의가 강자에게도 약자에게도 공평하지 않고, 양측 모두에게 이기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저버리지 않으셨듯이, 그래서 하느님 곁을 떠나 유배를 시작하는 동안 하느님께 돌아온다는 기약, 돌아올 가능성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곧바로 물으십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씻어 주시려고 우리처럼 알몸이 되시어 아담의 부끄러움, 그의 죄라는 알몸을 몸소 짊어지셨습니다. 곧, 그분의 상처를 통하여 우리는 치유된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권고하십니다. “나의 나약함, 내 가난이 아니면 내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나의 죄를 깨닫고 직시할 때, 나는 하느님의 자비, 그분의 사랑을 보고 만날 수 있고 그분께 용서받으러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용서 청함은 우리가 불편하고 부끄러운 기억에서 도망치거나 숨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길이며, 사랑에 대한 삶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용서와 회개 없이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어리석은 말에 귀를 기울이는 우둔한자가 아닌 진리에 귀 기울이고 진정한 용기가 있는 회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고통과 부끄러움을 통해 우리는 용기를 배웁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용기란 사추덕의 하나로 우리의 의지를 굳세게 하고 어렵고 곤란한 일이 있을 때에도 좋은 것을 따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줍니다. 용기에 반대되는 악덕은 겁과 만용이지만, 용기로 무장된 덕행은 너그러움과 인내와 참을성입니다. 용기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믿고 따르며 사람들 사이에서 진실을 주님의 법과 정의에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교회의 세월호 1주기 담화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세월호 참사를 통해 전정한 용서와 현 시행령안 폐기와 재검토, 세월호의 인양이 이루어져야 하며 모든 점이 투명하게 공개되어 공동선이 실현되도록 노력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참여하여 세월호를 통해 고통과 부끄럼움을 가진 우리 모두는 이제 우리의 일상에서 이것에 대한 빚을 먼저 갚아야 합니다. 세월호 참사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의 많은 부분 우리는 이기주의적이고 나 중심적이지 않나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나의 자녀만의 행복을 바라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가정과 함께 이웃의 가정도 함께 건강하게 행복해야함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물질주의와 세속주의가 만연하여 나만 찾는 이기주의, 옆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나의 자녀, 내 가족만 챙기는 불편함에서 우리는 함께 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제일 옳은 일이라는 망상을 버릴 때입니다.

 

세월호 참사로 우리는 아직도 사회적 고통 속에 있습니다. 또 세월호 참사의 고통을 통해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선의를 왜곡하려고 합니다. 한국 방문을 마치며 바티칸으로 떠나시는 전세기 안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적 고통 안에서 고통 받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 또 실천할 뿐입니다. 교황님께서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심을 언급하십니다.“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힘을 믿으십시오!”. 교황님께서 “인간적인 고통 앞에 서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고 언급한 것처럼, 그리고 “내 위로의 말이 죽은 이들에게 새 생명을 줄 수 없지만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면서 우리는 연대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고통과 슬픔의 순간에서 함께 하는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리고 세월호 희생자들을 통한 이런 기억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영원한 기억 속에서 세월호 참사가 하나의 사고로 기억되지 않고 불의에서 정의로 죽음에서 부활로 기억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인식과 실천을 통해 하루하루를 살아야합니다. 오늘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이 미사에서 장례 미사 때 우리가 바치는 기도를 그들을 위해 불러봅니다.

 

천사들이여, 세월호 희생자들을 천상 낙원으로 데려가소서.

순교자들이여, 세월호 희생자들을 영접하여 거룩한 도시 천상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