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제15기 사회교리학교
전민동성당 사회교리학교 제2강의
2015-9-17(목) 성당2층 성전(저녁 8시~10시)
사회교리의 신앙적 토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김유정 신부님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총무)
안동 사시는 할머니 이야기입니다. 안동에 혼자 사시는 할머니의 계셨는데, 교회에서 전도를 받아서 세례를 받아야 천당을 간다고 하니, 교리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문답식 교리였는데,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라고 물으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을 하는 식이었어요. 그래서 다 외우시고, 세례를 받는 날이 되었어요. 그래서 앉아계시는 데, 세례식 도중에 성직자가 말씀을 하는 도중에 그만 질문을 던진 겁니다. 그런데 하필 그 할머니에게로 질문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그러면 대답하기를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하고, 그러면 다시 성직자는 "맞습니다!"라고 시나리오대로 가려는 생각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해 무방비 상태로 있던 할머니는 대답을 까먹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하느님이 누구냐?", "교리 시간에 배웠을 것 아니냐?"라는 식이었던 거죠. 대답을 못해서 더욱 당황하고 있으니까, 또 한편에서도 성직자가 당황을 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줘야 하니까 마지막으로 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죠?"
그러자 대답하기를 "우리 오빱니다."
안동 할머님은 천당에 가셨을까?
그래서 세례를 못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겁니다. 마을 청년이 찾아가니까, 울고 계시더라는 겁니다. 세례를 못 받고 천당도 못 가게 생겼으니, 그래서 청년회장이 "왜 예수님을 오빠라고 한 겁니까?"라고 묻게 되었던 것이죠. 그러자 할머니가 말하기를 "예수님도 하느님 보고 아버지라고 하고, 나도 하느님 보고 아버님이라고 하고, 그라믄 오빠 아닙니까?" 그러자 청년"이 손을 꼭 잡으면서, "할머니는 천당 갑니데이. 구원 받습니데이."라고 하니, 할머니가 "세례를 못 받았는데, 우예 갑니꺼?"라고 말하자, "오빠 빽인데 왜 못갑니까?" 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할머니는 천당에 갔을까요? 못 갔을까요?
예수님께서 우릴 아주 많이 형제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형제 자매라고 부르신 성경 구절이 많습니다. 어디 있을까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고 반문하시는 구절이 있죠. (마태 12,48. 마르코 3,33)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코 3,35)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 (요한 20,17 중)
그리고 히브리서 2장 11절부터 12절을 보면요. 같이 읽어보실까요?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분명 여기서도 형제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런데 2장 12절 말씀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2장 17절 다시 같이 읽어보시죠. 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히브리 2,17 ㄱ)
그리고 로마서 8장 29절. 29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안동 할머니는 정답을 말했다
그리고 이 구절들 말고도 굉장히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는데,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까요? 아니면 없을까요? (...)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것과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차이가 없다. 그래서 우린 한 형제다. 그래서 사실상 안동 할머니의 말씀은 정답입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 5장부터 7장까지를 산상설교, 진복팔단으로 시작하는 산상설교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태 5,48끝)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참 어려운 말씀인데, 그런 말 앞에 붙어있는 말들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 숨어계신 너의 아버지. 그래서 숨어서, 골방에서 기도를 해라. 그러면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마태 6,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산상설교는 아무나 지키는 게 아니다
그런데 산상설교의 말씀은 아무나 지킬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된 사람만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아들로서 사신 체험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란 구절이 얼마나 나오는지 나중에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산상설교 한 가운데에, 마태오 복음 6장에 <주님의 기도>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 모든 말씀에 대한 집약입니다. 어떻게 시작합니까?
주님의 기도는 집약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우리 아버지라고 할 때 '우리'의 대표는 누구일까요? 우리의 대표자는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미사를 볼 때, 주례의 집전자는 신부이지만, 미사의 참된 집전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바치는 제사에 우리가 참여하는 겁니다. 주님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대표해 바치는 기도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시편 22편이 중요하다
아까 하브리서 2장 12절의 말씀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왜 이 말씀이 중요한가? 이것은 시편 22편23절을 인용(똑같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22편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바치신 것입니다.
(시편 22편 2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소리쳐 부르건만 구원은 멀리 있습니다.
시편 22편이 이렇게 시작을 하는 데, 23절에서 저 말씀이 있거든요.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서 이 말씀을 바치시면서, 그리고 그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로 저 말씀을 꼽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서 바치진 말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돌아가시면서까지 전하려고 했던 말씀은 뭔가? 예수님께서 형제들에게 아버지 이름을 전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엄청난 사실
사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 그것은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고대 시대 당시에는 독재자들이나 통치자들, 그리고 황제들 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신의 아들, 하늘의 아들,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중국의 황제는 천자, 로마의 황제는 신의 아들, 이집트의 람세스는 태양의 아들. 이런 뜻이죠. 그래서 '내가 잘못 다스리더라도, 너희와 나는 격이 다르니까, 복종해야 한다.' 즉 통치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정말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오셔서,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니까, 너희는 나에게 복종해라'라고 한 게 아니라, '내가 하느님의 아들인데, 너희도 하느님의 아들, 딸이다. 그러니까 다함께 아버지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자!'
이것은 예수님의 엄청난 초대입니다. 그럴 자격이 없는데 예수님께서 당신만 바치시고 부르실 수 있었던 칭호에 우리를 초대한 겁니다. 그래서 함께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교리적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로 말미암아서 그래서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인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초대 교회 시절의 엄격한 전례
그래서 예전에는 예비자 분들이 앞에 나오셔서 예비자 석에 따로 앉으셔서 미사를 봉헌하고는 했는데, 초대 교회 당시에는 말씀의 전례 끝나면 가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찬의 전례를 모실 수가 없었던 것이었죠.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이제 세례 받기 직전 전단계까지 오면, 성찬례 전례에 참여하는 데, '주님의 기도' 전에 돌아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직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세례를 받을 때, '주님의 기도' 수여식이 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얼마나 놀랍고 엄청난 칭호인가? 그런데 우리는 립서비스, 입술봉사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8절에 나옵니다.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마태 15,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르코 7,6)
이 구절을 보면,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 이라고 해서, 이사야서 말씀 인용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사실 우리는 미사를 드릴 때나 기도를 드릴 때 입술봉사를 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줄줄줄...' ... 제가 부제 때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사도들이 신경써서 만든 사도신경
본당 신부님이 주일미사 강론 끝나고 뭘 하시죠? 사도신경. 사도들이 신경써서 만들어서 사도신경이죠! 아니죠. 사도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우리의 믿음!. 어떻게 시작하나요? '천주 성부~' 그런데 신부님께서 그만 실수로, '전능하신 천주와~' 하셨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형제들께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 제 탓이요, 제 탓이요... " 절반 이상이, OOO 본당이었고, 주일미사에 800여명 하셨는데, 400명 이상이... 절반이 ... 그런 일이 있었고요. 어떤 본당에서는 주임신부님이 초등부 캠프 월화수, 중고등부 캠프 수목금 연달아서 캠프를 하시고 금요일에 오셨는데, 잠을 못 주무신 겁니다. 그래서 미몽사몽 중에 하시는 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에게 강복하시고 ... 아멘,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러자 주송하시는 분이 "파견성가는 OOO번입니다." 그래서 파견까지 다 하셨던 거에요. 그런데 하시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거였어요. 왜 빨리 끝났지? 그래서 다시 돌아와서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가톨릭 신앙의 핵심
어쩌면 우리가 입술봉사를 많이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정말 내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할 때 정말 아버지라고 믿는가? 성당에 오면 서로 뭐라고 부르죠? 형제님, 자매님, 왜 그렇게 불러요? 아버지가 같으니까. 아버지가 같으니까. 우리 신앙의 핵심은 그것입니다. 우린 하느님의 아들이고 딸입니다. 그래서 형제이고 자매인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갈 때, 아버지는 신자가 아니셨습니다. 전 외 아들이었고,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학교에 가겠다고 하니까 아버지는 대를 잇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집도 나가라고 주먹으로 바닥을 꽝 치면서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렇게 안돼!, 오늘부터 부자의 연을 끊는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그런 얘기를 다 하시더라고요. '집 나가라. 그리고 앞으로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그래서 한동안 못 불렀습니다. 그래서 홍길동전도 생각나고, 한동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8년 뒤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제가 신부될 때는 신자가 되셨어요. 제가 3년간 외국국 유학을 가기 전에 40일 피정을 하면서, 과거의 제 아픈 것을 많이 돌이키면서 보니까, 제가 제 아픈 부분을 잘 다루어 왔다고 보았는데 그렇지 않은 걸 발견했습니다. 사실 피정이란 하느님 안에서 굉장히 기쁘고, 평화로운 시간이 있지만, 복음말씀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 가셔서 40일간 유혹을 받으셨다고 나옵니다.
광야의 유혹
(마태 4,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2.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마르코 1,12~13) 12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13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루카 4,1~2) 1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2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루카복음에 보면,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 유혹을 받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순시기를 맞이해서 더 열심히 사려고 하면 할 수록 그걸 방해하는 유혹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사실 평상시와 같을지 몰라도 내가 더 민감하게 느끼는 겁니다. 고해성사 받고 나면 꼭 날 화가 나게 하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 시비를 걸고, 오늘부터 죄를 안 지으려고 하는데, 왜 그러냐면, 내가 죄를 안 지으려고 하기 때문에 '내가 죄의 길로 안 가려고 하는구나!'라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겁니다. 그래서 혹시나 알아차린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고 그냥 휩쓸려 가면 유혹에 빠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40일 피정을 하면서 여러가지 유혹들을 만났는데, 가장 큰 유혹은 제 사제성소에 대한 의심이었습니다. 제가 신부가 된 것이 과연 하느님의 뜻이었나? 왜냐면 7년간 아버지가 예비자 교리를 받겠다고 결심할 때까지 그 삶을 돌아보면 너무 엄청났던 것입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시고, 그래서 아버지는 힘들어하셨고, 덩달아서 어머님도 힘들어하셨고, 저도 힘들고, 방학 때 참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많은 상처의 원인이 바로 그날, 신학교에 가겠다고 한 날, 부자간 주고받아서는 안되는 말을 너무 많이 주고 받았고, 저도 대들고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수많은 일들이, '하느님께서 부르셨다면 이렇게 힘들었을까?' 혹시 착각해서 신학교 가서 신부되고 사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이 유혹인 것은 사제가 된다는 것은 그것을 공적으로 서품식 때 확인을 받는 자리가 되는 것인데, 그게 성소인데, 막상 유혹에 들어서면 그것도 다 의심스러웠던 겁니다. 그래서 정말 하느님의 뜻이었을까? 정말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뜻이 맞다면 아들이라고 불러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하느님도 아버지고 제가 실망시켜드리면, 하느님이 성에 안 차면 아버지라고 안하려고 아들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종일 기도를 해도 아무 느낌 없고, 두시간 기도하고, 성경 한 구절, 8시간 기도하고 성경 두 구절 읽었는데, 읽는 말씀마다 와 닿지 않았어요. 그래서 괜히 했구나. 제가 하느님을 시험하는 거죠. 그래서 다 포기하고, 그날 잠자기 전 두시간 또 기도하고, 성경말씀, 제가 고르는 게 아니고 주어지는 것인데 그 때 저에게 주어진 말씀이 거룩한 변모 장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를 데리고, 높은 곳에 오르셨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하늘에서 구름이 일더니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마태오 17:5 중,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래서 펑펑 울었습니다. 아들이라고 불러달라고만 했는데,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물론 이 말씀은 하느님 아버님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형제들에게 아버지를 전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루카복음 15장을 보면, 작은 이들이 잘못하고 돌아왔을 때, 뉘우치는 걸 낱낱이 듣고 용서하는 게 아니라 작은 아들을 보고 바로 달려가시는 아버지, 먼저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 그게 바로 하느님 아버지라는 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우리 모두가 사랑받는 아들딸,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 딸, 불리움을 받았음을 에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어찌되었든 그 당시는 울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런 상황을 말씀드렸다가, 혼난 경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응답까지 의심하면 어떡하느냐고 수녀님께 혼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말씀을 가장 마음 깊숙한 곳에 모시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사랑받는 자녀가 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하나?
이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안동할머니부터 여기까지가 한 세트입니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그 때 제가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걸 원하시는 구나. 이 얘길 전하기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마음에 드는 딸. 그리고 이 말씀을 달리 번역하면,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가 너로 인해 기쁘다는 이 말씀인데, 우리가 믿지 못하기때문에, 나는 아직도 부족해, 사랑받는 자녀가 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해. 잘못 생각한 거죠.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 사랑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고 계시고, 나로 인해서, 내가 한 일로 기뻐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내가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드실 때도 있지만, 여전히 나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여전히 하느님의 기쁨이 되는 그래서 나를 향해 달려 나오시는 그 아버지시라는 걸 예수님께서 전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꼭 전해드리는 게 저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잠깐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으시기 바랍니다. 천천히 들이 마실 때, 코와 윗입술 사이가 시원해지고, 또 내쉴 때 따뜻해집니다. 이 시원함과 따뜻함을 느끼면서, 창세기에 보면, ...
창세기 2,7)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하느님의 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요한 20,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가
미사 성찬기도 감사 기도 중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물고기가 물을 볼 수 없는 이유는 물 속에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하느님을 눈으로 볼 수 없는 까닭은 하느님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겨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어디 계시냐고 멀리서 찾을 때, 내가 하느님 안에서 숨 쉬고 있다. 이보다 가까이 하느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심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자 이제,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 내쉬면서,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 아들 딸, 둘 중 하나를 하시고, 호흡의 리듬에 맞춰서 열 번 해보겠습니다. ... 느낌이 어떠십니까? 느낌 좋으려고 하는 게 아니고, 이것은 하느님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라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다만 내가 하느님께 내 마음을 드리고 있다는 것과 말씀을 되풀이하면서, 내 마음을 말씀 안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옆 사람을 보라
이번에는 옆의 분을 한번 보시겠어요. 누구죠? 딸이고 아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함부로 대하면 안됩니다. 함부로 대하면 이 분의 아버지가... 아버지가 누구냐에 따라서 달라지죠? 저 사람 아버지가 장관이야! 그렇죠? 저 사람 아버지가 하느님이야! 그러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겠죠? 내 남편이 아니고 하느님 아들이고, 내 자식이 아니고, 하느님의 자식이다. 내 부인이 아니고 하느님 딸이다. 이 말씀을 어느 본당에서 드렸더니, 어느 자매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내가 하느님의 딸인 줄은 알고 있었는데, 우리 신랑이 하느님 아들인 줄은 오늘 처음 알았어요!" 이러면 안되는 거에요. 내가 하느님의 아들 딸이고, 내가 함께 사는 사람도 그렇다는 것. 그런데 이것이 점점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내가 얼마나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가를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이 세상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는 가에 달려있다고 하셨어요. 이 범위가 점점 더 넓어진 분이 계십니다.
이태석과 황일광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에서 이름모를 어린 아이들이 내 형제자매라고 생각하셨고, 순교자 분 중에 황일광 알렉시오라고 계십니다. 이번(2014.8.16, 광화문 시복미사)에 복자품을 받으신 분입니다. 이 분이 순교하시기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지금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다. 나는 하늘나라를 이미 살았고, 이제 영원한 하느님 나라로 옮아가고 있다. 나는 백정이라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는데, 천주교인들은 나를 형제라고 불러주었다."
이미 천국을 살았다
'이미 천국을 살았다.' 이 말씀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떤 분이 말씀하실 때,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있기도 전에 공의회의 말씀을 이미 하신 것이라고 했어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라고 하셨죠. 이미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영원한 하느님 나라로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았다고 고백을 하시는데, 그 이유는 형제자매였기 때문에,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방법은 내가 하느님의 아들 딸로서, 내 형제 자매인 하느님 아들 딸들과 살아가는 구나. 모르는 사람도 내 형제구나. 그걸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겁니다.
그걸 가장 넓으신 분은 프란치스코 성인이셨습니다. 태양과 바람을 형님이라고 얘기하고, 달과 별을 누님이라고 하고, 불을 형님이라고 하고 물은 누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에 죽음을 보고, '나의 누이여 어서 오라.' 죽음까지도 나의 누이라고 불렀습니다.
형님인 태양의 찬가
류해욱신부님 옮김
지극히 높고 강하며 선하신 주님. 모든 찬미와 영광과 기림과 축복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오로지 당신, 지극히 높으신 당신께만이 합당한 까닭이나이다. 그 누구도 당신의 지존한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당신이 지으신 모든 창조물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특별히 형님인 태양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태양을 낮이 되게 하시어 저희에게 빛을 주시었사오니 태양은 아름답고 찬란한 광채를 띠우나니 당신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인 달과 별들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맑고 빛나고 사랑스럽게 하늘에 그들을 지으신 분은 당신이시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형님인 바람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공기와 구름과 맑고 고요한 날씨와 온갖 기후를 통해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그들을 통해 당신은 손수 지으신 창조물들을 살피시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인 물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물은 쓸모있고 겸손하며 맑고 소중하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형님인 불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불은 아름답고 장난스러우며 활달하고 강하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이며 어머니인 대지로부터 찬미를 받으소서. 저희를 지켜주며 다스리는 대지는 온갖 과일이며 색색의 꽃과 풀들을 자라게 하시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남을 용서하는 사람들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아픔과 고난을 참아 받는 사람들을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을 바라보며 고요히 참아내는 이들은 복되나이다. 그들은 월계관을 받을 것이옵나이다. 저의 주님,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누님인 육신의 죽음을 통해서도 찬미를 받으소서
아무도 죽음을 피할 이 없나이다. 대죄를 짓고 죽음을 맞는 사람은 불행할진저! 당신의 지극히 거룩한 뜻 따르며 죽음을 맞는 사람들은 복되나이다.두번째 죽음이 그들을 해칠 수 없는 까닭이옵나이다. 저의 주님께 찬미와 축복과 감사를 드리오며 지극한 겸손으로 당신을 섬기나이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 형님인 태양의 찬가’는 성 프란치스코가 지닌 있는 독특한 자연과의 일치로 주님을 찬미하고 있으며 성인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극명하게 보여주어 프란치스코 영성의 진수로 평가된다.
나도 너희의 형제다
사회교리는 그래서 신앙적 기초가 오늘의 주제입니다. 저는 그걸 한마디로 우리가 형제 자매들에 대해서 말로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내 형이고 동생으로, 이 세상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입니다. 우리 가족이니까. 예수님이 꾸신 꿈이 그것이었습니다. 나도 너희의 형제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 뿐이시다. 너희가 다 형제다. 나하고 너희도 형제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교리서 2419항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지혜에 부합한, 정의와 평화가 요구하는 바를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가톨릭교회교리서. 2419항 전문 (제3편 그리스도인의 삶. 제2부 십계명. 제2장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제7절 십계명, Ⅲ 교회의 사회교리 중 첫번째 항목) 2419 "그리스도교 계시는……사회생활의 법칙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 160) 교회는 복음서에서 인간에 대한 진리의 완전한 계시를 받는다.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명을 다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간의 품위와 사람들을 일치시켜야 할 그 소명을 인간에게 증언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지혜에 부합한, 정의와 평화가 요구하는 바를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그리고 이어서 2422항에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빨간 굵은 글씨)
2422 교회의 사회 교리는 점차로 분명해지고 체계화되어 가고 있다. 이 가르침은, 역사가 흐르는 동안 발생한 사건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말씀 전체에 비추어서, 그리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해석함으로써 교회가 점차적으로 표명하는 것이다.163) 이 사회 교리는 신자들의 행동에 반영될수록, 선의의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된다.
그리고 2423항 교회의 사회 교리는 성찰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판단의 기준들을 이끌어 내며, 행동의 지침들을 일러 준다.
평화가 거대한 환상이라면?
브라질 유명한 주교님이 계십니다. 돔 핼더 까마라 주교님이라고 하는데요. 그 분께서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정의와 사랑이 없으면 평화는 언제나 거대한 환상일 것이다."
이번에 교황님께서도 비슷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는 정의,를 전제로 한다." 까마라 주교님 굉장히 유명한 말씀하셨는데요.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聖人)이라 부르고,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왜 먹을 것이 없는지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빨갱이(사회주의자)라고 부른다."
참고자료.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
[하나되어 다시 읽기 -2]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신약 안의 '연민'이란 단어
'연민'이란 단어가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 '스플랑크논'이라는 희랍어(=헬라어, 그리스어)인데,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 대해 갖고 계신 여러 마음 중 하나 입니다. 이걸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 가장 비슷한 단어가 '연민'입니다. 영어로는 Compassion입니다. 같이 느낀다는 겁니다. 원래 '스프랑크논'이라는 단어는 구약시대는 감정이 내장기관에서 올라온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 마음은 저 사람이 너무 불쌍해서 애간장이 내 창자에서부터 그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오르는 것, 그래서 연민보다 더 세고 적극적인 표현인데요. 루카 6,36을 보면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1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에게 임금님이 품었던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죠.
매정한 종의 비유(마태오복음 18,23~35)
마태복음 18장 27절을 보면, 어떤 종이 1만 달란트를 빚졌는데, 다 갚겠다고 말하니까,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18,28절)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났는데, 그 동료가 똑같이 했어요. 엎드려서 사정을 한 겁니다. 그런데 반응이 달랐어요. 왜냐하면 이 종은 연민이 없었고, 동료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감옥에 가두어버리니까, 나중에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는, (18,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하면서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회개하는 삶의 다양한 형태
회개라고 하면 딱 한가지만 생각해요. 그냥 십자가의 길 하는 거. 그런데 우리 삶이 전반적으로 돌아서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으시고, 정의로운 하느님이시고, 늘 구약에서 예언자를 통해 공정을 말씀하시니, 저런 것이 우리 회개의 실현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은 뭐냐면, 제가 영성신학을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데, 이게 좀 어려운 과목입니다. 왜냐면 가르치는 사람이 잘 몰라요. 그런데 제가 대학원 1학년 영성신학 시간에 이걸 듣고 많은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하느님과의 섣부른 약속
제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릎쓰고 신학교를 갔잖아요. 그래서 저는 굉장히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루 종일 기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빨래할 때도 마음 속으로, 빨래를 갤 때도 기도하고, 저는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고해성사를 할 때, 죄를 고백한 것은 딱 두가지였습니다. 뭐냐면 하나는 담배를 끊겠다고 약속을 해 놓고, 담배를 못 끊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요. 왜 약속을 했을까? '하느님 저 담배를 끊으려고 합니다. 도와주십시요.' 그러면 되는데, 함부로 약속하는 게 문제에요. 제 영성지도 신부님께서는 '다음에 꼭 끊어보아요.' 이렇게 말씀을 하셨지만요.
넌 지금 죄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두번째는 형제를 비판한 것입니다. 왜냐면 전 너무 열심히 사는 데, 저 친구는 별로 열심히 안 살아요. 집에서는 서포트를 많이 해주는데, 부럽기도 하고 판단을 많이 했습니다. "왜 저렇게 열심히 살지 않을까!" 그러다가 나중에 복음서를 보고 똑같은 사람이 있더라고요. 바로 '바리사이'. 저는 되게 열심히 살았는데, 그것도 너무 억울했습니다.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아니 그건 아니고, 열심히 살았는데, 그러면서 죄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전 세상에 관심이 별로 없었어요. 저는 제 아버지가 "유정아, 내가 잘못했다. 내가 너 때문에 구원받는구나!" 이 얘기를 하실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빨리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 데살로니카 1서, 2서 보면 세상 멸망에 대해서 얘기가 나오죠. 그래서 전 그 날이 빨리 왔으면... 하면서 세상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방학 때 힘들었던 이유 중 하나가 본당에 가서 뭔가 일이 있고 난 뒤의 뒷풀이 하는 것들이 싫었고 그냥 기도만 하는 게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라고 믿고 살았는데, 그게 영성의 큰 두가지 흐름인데, 그 중 한가지만 영성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은 바로 종말적 영성이었던 겁니다.
영성의 두가지 큰 흐름
그래서 종말적 영성이란, 이 세상을 죄와 고통의 장소로 보고, 인간 구원과 성화를 천상적이고 종말론적인 면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이고, 현세에서의 이탈, 자기 성화, 완덕을 강조하고, 주로 십자가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즉, 파스카 신비의 죽음이 참여하도록 권고하는 영성입니다.
그런데 다른 중요한 영성이 있습니다. 뭐냐면 육화적 영성(강생적 측면)이란 것입니다. 저는 세상을 굉장히 미워했는데, 원래는 교구 신부가 아니고 봉쇄수도원 들어가고 싶었는데, 그것도 착각이었습니다. 봉쇄 수도원이 그런 삶이 아닌데요. 저는 부끄럽습니다만, 세상을 미워했어요. 그런데 요한 복음 3장 16절에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뭔데 세상을 미워하나! 그것이 제 잘못이란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영성의 육화적 측면이란 뭐냐면 너무나 사랑하셔서 아드님을 보내주신 이 세상, 그렇다면 사랑한다면 얼마나 사랑하는 것인가? 정말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을 강조하게 되는데요.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육화를 강조한 것인데, 그리스도의 육화와 부활로 말미암아 성화된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고요. 따라서 현세적인 일들을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현세의 기쁨과 고통 등 모든 것을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일치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것을 업신여기지 않고 올바르게 사용하여 세상의 성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여기서 두가지 측면이 있는데, 사실은 종말적 측면 이것만 영성이라고 생각해도 문제고, 이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육화만 생각하는 것도 문제는 문제인데, 올바른 영성은 결국 한 쪽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앞서 언급한 황일광 알렉시오 복자의 말씀이 중요한 까닭입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았다. 나는 이제 영원한 하느님 나라로 옮아간다."
이 두가지가 다 하느님 나라고, 이 두 가지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필요한 겁니다. 사실 이것을 잘못 따라가는 건 우리고, 예수님께는 그런 분리가 없었어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였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지극히 종말적이고 지극히 육화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혼동되지 않으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 수난을 기념하는 것일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성체를 모실 이유가 없습니다. 언제나 수난과 부활이 함께 있고, 그래서 종말적 영성과 육화적 영성은 삶에 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교회는 한 측면(종말)만을 강조한 것이 사실입니다. 근대 이후에 또 프랑스 대혁명 때, 민주주의적 측면에서는 매우 중요하지만, 당시 아주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살해되었습니다. 단지 성직자이고 수도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기 때문에 이 종말론적 영성이 굉장히 발달했던 겁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많은 분들이 살해를 당한 것이죠. 그런데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란 책이 있습니다. 조르쥬 베르나노스라는 신부님이 계신데, <어느 시골신부의 이야기>(1936)라는 책으로 유명하십니다. (국내는 1960년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제5권) 이 분이 1948년에 희곡작품으로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란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그냥 가르멜 수녀원에서 그냥 순수하게 수도생활하던 분들이 그냥 혁명군에게 살해당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교회는 종말적 영성이 혁명 이후 강조되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교회에서는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프랑스 교회는 알짜배기들만 모여있다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분들이 선교사가 되어서 그런 영성으로 조선 땅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에 가면 죽는 거 뻔히 알지만, 샤스땅 신부의 편지를 보면 눈물이 나옵니다. 부모님께 편지를 쓰는 겁니다.
지극히 사랑하올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께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올해에는 부모님의 소식을 듣게 되려나하고 기대해 보았으나, 아직 아무런 편지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빌 뿐입니다만, 제게는 작은 희생을 하나 더 주님께 바치는 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비할데 없이 좋은 곳으로 들어가게 될 것 같습니다. 그 곳에서 우리보다 앞서 가신 영광스러운 순교자들과 함께 영원한 휴식을 누릴 수 있게 되리라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부모님과 형제들이 너무 상심하지 않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그러니까 15년 전부터 우리의 사랑하는 조선은 어느 정도 평온을 누려왔습니다. 박해 때문에 흩어졌던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 수 있었고, 선교사들을 모실 수 있게 되어 큰 기쁨이었으며, 주교님까지 입국하시게 되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도 잠시 뿐 백여명의 신자가 체포되고, 재산은 몰수당하고 육신은 매질로 만신창이 되었고, 혹형과 감언이설을 견디지 못한 신자들은 배교함으로 하느님과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단은 올해 들어 더욱 더 날뛰고 있는데, 지독한 박해때문에 나이,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2달 동안 25명이나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참수, 치명하셨고, 5명은 고문 도중에 혹은 그 후유증으로 죽었으며, 150명 이상의 신자들이 감옥에서 같은 운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배교한다는 그 말 한 마디만 한다면 그 혹독한 고통에서 또 죽어가는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지만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이 모든 형벌을 기쁘게 견디어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양떼를 흩어버리거나 도살장으로 끌고 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목자까지도 잡아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지난 8월 11일에는 주교님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이 나라에 와 있는 두 선교사들을 잡아들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갓 입교한 예비 신자들까지도 선교사들에게 기꺼이 은신처를 제공해 주어 우리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신자들이 숨겨준 덕분에 넉 달 동안 숨을 수 있었지요.
그러나 우리 주교님께서 현 상황에 미루어 보건대, 지금은 목자가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때라고 현명하게 판단하시어, 직접 자수하심으로써 착한 목자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당신처럼 하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박해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교님의 명령을 받들어 자수하라는 명령도 피신명령처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다만 이 모든 일을 통해 하느님의 좋은 뜻이 이루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이곳 조선으로 올 때 하는님을 위해 언젠가는 고통을 받아야 할 것임을 각오하고 있었고, 저는 이제 곧 순교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사랑하는 조선땅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5명의 신자들이 고문을 당하고 있었고, 또 끔찍한 소식을 들으면서 겁에 질려 떨었던 게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용기의 은총을 주셨고, 심지어 10세에서 15세의 어린 신자들까지 혹독한 고문을 끝까지 견디며 보여준 덕분에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내일 동료 신부와 주교님을을 압송해 간 장교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둘이 함께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감옥으로 끌고 가겠지요. 그 곳에서 주교님과 순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랑하는 열심한 신자들을 다시 만나게 되면 큰 위로가 되겠습니다.
어쨌거나 저의 온 마음은 주님께로 향해 있는데, 만일 이 좋은 기회를 통해 지극히 사랑하는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된다면, 부모님께서는 저의 이 큰 행복 때문에 괴로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주님께 크나큰 감사의 기도를 올려 주십시오. 제가 이 세상에서 부모님과 가족 모두를 사랑했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순교의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가는 은총을 허락하신다면 그 곳에서도 여러분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마지막이 될 이 편지를 통해 지극히 사랑하올 부모님, 형님과 동생,누이들, 친척과 친구 여러분에게 하직인사를 올립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제게는 금도, 돈도 없으니 유산으로 남길 것이라고는, 신자들이 마련해 준 옷 몇 벌이 전부인지라 뒤처리 하는 일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물질로 보면 가난하나, 십자가의 은총으로 보면 비옥한 이 조선땅으로 저를 불러주신 주님께 끝없는 감사를 올려 주세요. 이제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더 길게 쓸 수가 없어요.
부모님, 형제 자매님, 자식으로서 사랑받았고 형제로 정을 나눌 수 있었음은 제게는 더 없는 영광이었습니다. 하기에 아들로서 부모님께, 한 가족 된 형제 자매들에게 사람으로 지닐 수 있는 가장 큰 사랑과 정성으로 인사드립니다.
Jacques Chastan(정야고보)올림
저는 행복하니까 그렇게 아시고, 전 자수하러 갑니다. 제가 숨어있는 것도 주교님의 뜻이었고, 지금 저는 권고에 의해서 계속 숨어 있으면 너무 많은 교우들이 죽어가기에 지금 자수하러 갑니다. 당신의 아들이어서 자랑스럽다는 식으로 편지를 쓰셨어요. 그런 혹독한 상황에서 언제나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던 훌륭한 분들이 조선에 오셔서 피로 한국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순교자들의 삶이란?
한편으로 종말적인 면이 많이 강조되었고, 전세계적 흐름이었고. 우리도 그랬는데, 지금 우리는 다른 세상을 살고 있으니, 과연 오늘날 순교자들의 삶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내가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우리가 바로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두 영역이 조화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루터의 5대 원칙
(1483.11.10~1546.2.18) 신성 로마 제국의 기독교 신학자는 원래 신부였다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의 만인 성자 교회의 문 앞에 ‘95개 논제’를 내 걸음으로써 기존 교회와의 본격적인 논쟁에 들어가게 되며,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루터가 내놓은 다섯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가톨릭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 것들입니다. 앞으로 이런 것들 따른다고 말했는데요.
1) 오직 성경으로만
2) 오직 믿음으로만
3) 오직 은총으로만
그 다음에 밑의 2가지는 유명하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가톨릭하고 똑같은 거니까요.
4) 오직 그리스도만
5)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래서 위의 세가지(오직 성경, 믿음, 은총)만 가톨릭과 다르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3) 오직 은총으로만'도 가톨릭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로 올바로 사는 건 은총이기 때문에. 그래서
문제는 위 1)번과 2)번 두가지입니다. <오직 성경으로만>과 <오직 믿음으로만> 이것이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오직 성경으로만>에 비해서, 우리는 성경과 성전을 합쳐서 하느님 말씀으로 합니다.
이 구절은 성경 어디에 있는가
스콧 한(Scott Hahn)
1957년에 태어나 10여년간 장로교회 목사요, 교수로 활동하다가 1986년 부활절에 가톨릭으로 돌아온 스콧 한은 성서와 가톨릭 교회 신앙에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국내외 에 발표하고 있다. 1979년 그로브 신학대학에서 신학,철학,경제학을 전공 했으며, 1982년 고든 콘웰 신학대학에서 조직신학 석사학위를, 그리고 1995년 마르케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최우수로 수여 받았다. 현재는 1990년 이래 스투벤빌 프란치스코 대학교에서 신학과 성서학 교수생활을 하고 있으며, 2002년에는 성바오로 성서신학센터(Scotthahn.com) 를 설립,운영하고 있다. 같은 해 콜럼버스에 있는 요세피눔 교황청 신학대학 부교수로 초대되었고, 성서문학학회를 비롯한 여러 기관에 가담, 활약하면서 탁월한 교수법 과 연구실적으로 다양한 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영원토록 당신 사랑 노래하리다] [어린양의 만찬] [거룩하신 모후님,하례 하나이다]외 다수가 있다. 몇십 편에 달하는 논문과 글을 썼으며 오디오,비디오 테이프가 있다.
참고적으로 스콧 한 교수님이 쓰신, <당신 사랑 영원토록 노래하리라>란 책이 있습니다. 스코탄 신부님은 원래 개신교 목사였고 신학교수였습니다. 그런데 가톨릭을 연구했습니다. 가톨릭을 연구한 이유는 그것이 이단이기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단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증명하려고 연구하다가 개종했습니다. 그 분이 부딪쳤던 구절이 저겁니다. <오직 성경으로만> 이 구절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모든 진리는 오직 성경 안에만 있습니다.'라는 구절이 성경 안에 있습니까? 그런 구절이 없습니다. 성경에 없는 구절을 풀어냈으니까 틀린 겁니다. 진리는 성경 안에만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성경 안에 없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믿을 구절이 아닌 것. 그래서 자기 교수와도 얘기하다가, 지금은 굉장히 유명한 가톨릭 평신도 선교사 겸 책도 많이 내고, 교수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루터의 믿음
루터는 오직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로마서의 말씀을 읽고 그랬는데, 사실 로마서 3,28절을 읽고,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아 그렇구나 실천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구나!'했는데, 사실 야고보서에 정 반대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고보서 2장 24장을 같이 읽어봅니다.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루터가 저 구절을 어떻게 했을까요? 저것을 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야고보서는 지푸라기같은 서간이다."라고 하면서 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경을 새로 하려고 했는데, 안되고, 나중에는 인정을 했어요. 그런데 루터는 저 구절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겁니다. 로마서 3장 28절.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
율법이 아니라 믿음
그런데 행위와 상관없는 게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가 하시는 말씀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란 게 아니고요. 대칭을 잘못 이해한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말씀과 야고보서 말씀이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황님께서 <복음의 기쁨>에서 '사랑으로 실천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갈라디아서 말씀을 인용하신 겁니다.
갈라티아서 5,6)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사회교리의 신앙적 토대 (2)
대전가톨릭대학교 김유정 신부님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총무
하기동성당 2015년 3월 11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열린 사회교리학교 2주차 강의 모습
알아듣는다는 것
어떤 할아버지가 신문을 보고 계시는 데, 노화의 단계가 5 미터에서도 못 들으면 심각하고, 3 미터에서도 못들으면 더 심각하고, 1 미터에서도 못들으면 그건 엄청 심각한 상태이다. 그래서 '내 할멈은 어떤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할멈 뭐 해?"라고 물었더니, 못 들으시더래요. 그래서 3 미터 뒤로 다가가서 "할멈 뭐 해?"라고 하는 데도 대답이 없으시더랍니다. 그래서 1 미터 뒤에 가서 "할멈, 뭐해?"라고 하는데도 아무 대답이 없으신 거예요. 그래서 뒤에서 꼭 끌어안으시면서, "할멈! 그동안 내가 고생만 시키고 너무 무심했구나. 할멈! 뭐~해?" 그러니까 할머니가 뭐라고 하셨을까요? "수제비 만든다고 세번을 얘기했어, 세 번을!"
대화가 안 통한다고 생각할 때, '저 사람이 내 말을 못 알아 듣는다!'라는 생각이 들 때, 사실은 내가 못알아 듣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섭리에 대한 말슴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말씀을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로 풀어볼 수 있죠. 창세기 37징부터 50징까지 나오는데, 야곱의 아들이 몇 있었죠? 열 두명 있었어요. 여기서 잠시 동영상 3분 30여초 짜리 하나 보고 얘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2830 "저희의 양식."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께서 삶에 필요한 양식과, 물질적이고 영적인 '합당한' 모든 재화를 주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우리 아버지의 섭리에 협력하는 이 자녀다운 신뢰를 강조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갖 불안과 걱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하신다. 그리고 이것이 하느님의 자녀들이 자녀답게 의탁하는 일이다.
강우일 주교와 함께 걷는 세상. 지은이 강우일, 바오로딸 출판. 2012.12.20 정가 6,000원 |
사회교리의 신앙적 토대 | 대전가톨릭대학교 김유정 신부님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 제15차 사회교리학교 2주차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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