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교구 전민동 성당은 서울교구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님을 모시고 대림특강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2014년 12월 2일(화) 저녁 8시 전민동성당 2층 성전에서 열린 이 자리에는 많은 신자분들이 참석하시어, 박 안드레아 신부님의 사회교리에 관한 강론을 들었습니다. 8시부터 10시까지 약 2시간동안 열린 특강은 <복음화의 사회차원>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이 내용은 실제 강연내용과 일치하지 않은 부분들이 존재하며, 교리내용 등은 글의 구성을 위해 필자가 삽입한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함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 인간의 존엄함이란 무엇입니까? 사실 우리의 인권 수준과 다른 곳의 인권 수준과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경제적 권리를 주장하지만, 잠시 후 보시게 될 <람페두사 이민자>의 경우에는 생존권 자체를 위협받고 있습니다.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님
그런데 인간의 권리 중에서 가장 절박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생존권입니다. 어떤 이들은 문화적 권리까지 요구할 수 있겠습니디만, 권리 중에서 가장 절박한 것은 바로 생존권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구체화한 것을 바로 '인권'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사람이 지닌 '인간의 존엄함'... 내가 아닌 다른 모든 이들도 인간의 존엄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제3편 그리스도인의 삶>의 <제1부 인간의 소명: 성령 안의 삶>에서 다루는 첫번째 장은 바로 인간의 존엄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목이 <제1장 인간의 존엄성>인 것입니다.
제 3 편 그리스도인의 삶
제 1 부 인간의 소명: 성령 안의 삶
제 1 장 인간의 존엄성
1700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제1절). 인간의 존엄성은 하느님의 참행복에 대한 소명 안에서 완성된다(제2절). 인간은 마땅히 이러한 완성을 자유롭게 지향해야 한다(제3절). 인간은 자신의 의지적 행위로(제4절), 하느님께서 약속하시고 양심이 증명하는 선을 따를 수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제5절). 인간은 자신을 형성하고 내적으로 성장한다. 인간은 육체적 생활과 영적 생활 전체를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한 재료로 삼는다(제6절). 은총의 도움으로 인간의 덕행은 성장하며(제7절), 죄를 피하고, 만일 죄를 지었을 때에는 되찾은 아들과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비에 자신을 맡긴다(제8절). 이렇게 해서 인간은 완전한 사랑에 이른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이의 권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권리는 세부적으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시민의 권리>입니다. 바로 정치영역의 권리인 것입니다. 두번째는 <사회적 권리>입니다. 문화적 권리이면서 경제적 권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환경권 혹은 연대의 권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정치영역 권리 - 자유권
경제문화사회 권리 - 평등권
개발환경 권리 - 연대권
우리나라에서 박애라고 번역하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보편적 형제애입니다. 입에 달고 사는 보편적 형제애. 영어로는 fraternity (프래터너티, 발음. 후러터너리)라고 하는 데요, 이를 연대권이라고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다른 이의 선의, 다른 이의 이러저러한 권리들을 침해하지 말아야 하고, 둘째는 보호해줘야 하며, 셋째는 그 권리를 신장 증진시키는 데 내 삶을 할애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제 1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의하십니까? 그것이 교리서에 나온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그리고 '경제적 권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노동할 권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죠. (반대적 측면에서 보면) 기업운영의 권리도 있고, 기업의 처분권도 있죠. 그래서 이런 상대적 가치들이 충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적절할지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회 정의와 공동선
두번째 장은 사회정의와 공동선 얘기가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은사회정의와 공동선을 실천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 3 편 그리스도인의 삶
제 1 부 인간의 소명: 성령 안의 삶
제 2 장 인류 공동체
1877 인류의 사명은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성부의 외아들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 사명은 각자가 하느님의 행복으로 들어오라는 요구를 받고 있으므로 개인적 형태를 취하면서도, 인류 공동체 전체에 관련되기도 한다.
공동선이란 단어는 듣기에는 좋지만 우리의 사회에서 '정의'를 얘기하는 것은 첨예하게 부딪치게 됩니다. 그런데 '정의'는 통상 4가지로 나눠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교회에서는 '하느님께 돌려드릴 것은 하느님께로'라고 언급하면서 바로 카이사르의 얘기가 나오겠지만, 사실상 교회 정의는 전통적으로 이웃에게 돌려줄 것은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일반적 정의는 교환정의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상호간 정당하게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것이죠. 법적 정의는공동체에게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배 정의는 공동체가 구성원에게 마땅히 줘야 할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점점 더 안되고 있습니다.
제가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서 사목한 지 약 3년 반 정도 되었습니다. 사목하는 그 3년 반의 세월 동안에, 우리 동네에는 24시간 편의점이 많이 생겼다가는 그 사이에 벌써 몇개가 없어졌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처음에는 어떤 현상을 보이냐면, 시간제로 일하는 친구들, 주로 청년들이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그 가게가 어려워지는 걸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가게에서 일하시는 저 분이 편의점의 점주님일까? 아니면 그 부인이실까?하는 걸 보게 될 때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건비를 주기 어려울 때 가족이 참여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다가 몇개월 후에 가게 문을 닫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사장님이 게을렀던 것일까요? 아니 그 사장님이 게으른 게 아닙니다. 코피 터지게 일했습니다. 그런데 노력과 비례하는 수익이 나지 않습니다. 유가와 환율, 원자재값 이 세가지 요인이 작동하는 것이죠. 결재해야 할 달러 값이 확 뛰게 되면, 가만히 앉아서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그 사장님은 월급을 줘야 하는데, 못 줄 수가 있게되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그렇다고 게으른게 아닙니다. 그런 일이 현대 사회에서는 벌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장님이 불가피하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김군 이번달 월급 다 못주겠네!"
그러면 나쁜 사장님인가요? 애매하죠. 그런데 노동자 입장에서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죠.
"사장님 전 받아야 합니다. 저도 애들 학교 보내고 먹여야 합니다!"
나쁜 노동자입니까? 아닙니다. 둘다 선의의 사람이지만 외부의 환경이 강제하는 상황이 처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러할 때 동원되는 게 사회정의입니다. 사회가 그 구성원들이 의무를 다하도록 조건을 만들어주는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가 하는 일이고 우리가 함께 해야 하는 일입니다.
농가에서 일년 농살 졌는데, 우박 때문에 농사를 망쳤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누구탓이죠? 하느님 때문이죠. 하지만 하느님께 보상을 요구할 수는없습니다. 그럴 때 등장하는 게 보험이란 것입니다.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것을 보호해주는 장치들이죠. 그래서 그것을 사회정의의 대표적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국민건강보험, 실업급여, 국민연금 등이 그런 사례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 추운 겨울에 임금이 없는 이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노동력을 상실한 이도 품위있는 인간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들이 사회정의의 사례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인류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2014년 11월 17일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박동호 신부, 이하 정평위)가 발행한 3번째 사회현안 자료.
<사회교리로 세상보기 : 십계명과 한국사회>
이 자료에 따르면, 십계명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의무들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3편 ‘그리스도인의 삶’(지킬 교리)은 사회교리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특히 제2부에서는 십계명을 현대의 우리 삶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가르친다. 이 자료는 사회적 이슈를 「가톨릭교회 교리서」 의 십계명으로 살펴본다.
십계명과 한국사회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우상숭배하는 분은 없으시죠? 하지만 점을 본 분들은 계시죠. 가끔 굿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 동네(서울 신정동) 주위에도 두 군데 점 집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 중에서 제1계명은 하느님 만을 흠숭하는 것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흠숭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우리 삶의 훌륭하 지침입니다. 그리고 죄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다운 인간성을 가르쳐주는 '자연법'입니다.
가톨릭 교리서 제 3편 <그리스도인의 삶>의 제1부에서 다루는 것은 <인간의 소명: 성령 안의 삶>이란 제목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공동선'과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길을 말해주고 있다면, 제 2부에서는 십계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참다운 인간적 권리들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모든 사회 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본 규율인 것입니다.
제 3 편 그리스도인의 삶
제 1 부 인간의 소명: 성령 안의 삶
제 2 부 십계명
십계명
일.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사.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오. 사람을 죽이지 마라.
육. 간음하지 마라.
칠. 도둑질을 하지 마라.
팔.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구.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십.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그런데 사업하시는 분들을 보면 개소식때 돼지머리 놓는다든지, 점을 보러 다닌다든지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하느님을 부정하면서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저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에서 비롯된 일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국가숭배, 재물숭배, 인종숭배 이런 것들은 어떻습니까?
국가숭배, 재물숭배, 인종숭배
국가주의라고도 말하는 것이 있죠. 국가란 무엇인가? 과연 여러분은 국가를 절대적으로 봅니까?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 애매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얘기를 꺼내면 표정들이 이상해집니다.
재물은 어떻습니까? 사실 돈 나고 사람이 난 게 아니고, 사람 나고 돈 난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그런 말이 끝나자 마자 머리 속이 어지럽죠. 어쩌면 지난 8월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국을 다녀가셨지만, 우리는 환영하던 우리 마음의 진성성을 따져봐야 합니다. 올해 초 펴낸 <복음의 기쁨>에서 프란치스코는 오늘날의 경제를 자유주의, 절대자유주의, 신자유주의 경제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독이라고 말합니다.
십계명 중에서 제5계명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인데,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돈 아래 두는, 돈을우상으로 섬기는 그런 경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소개하면서, 그러면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국사회에서는 경제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사회가 경제를 비켜서서 생각해 본 일이 있나요? 가정, 교육, 정치, 문화? 경제가 모든 분야를 압도하는사회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죠. 경제가 모든걸 압도하고 지배하는사회입니다. 교황은 그것을 복음의 기쁨에서 새로운 독재라고 말했습니다. 우린 그분을 열렬히 환영했죠
국가와 인종을 절대시하는 것도 우상숭배라고 할 수있습니다. 십계명 중에서 하느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고 하셨죠? 제 어릴 적에 찬장에 보관해 둔 계란을 몰래 꺼내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할머니가 혼내시죠. 안 먹었다고 우기다가도 "찬장 계란 먹었지?"라고 하시던 할머니가, "너 천주님께 맹세할 수 있어?" 라고 하시면 그 때에야 비로소 고개를 처박고 맙니다.
3계명. 거룩하게 지내라
'거룩하게 지내라'는 3계명도 이습니다. 제가 성당에 가서 하느님을 예배하고 휴식을 취하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경제적인 이유때문에 그 일을 못하는 이들을 배려해야 함이 십계명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제가 있는 곳은 양천구 신정동 성당입니다. 양천구는 목동이 있습니다. 목동 1단지부터 14단지를 목5동, 목동, 양천성당이 관할합니다. 여기는 교우비율이 30%입니다.
저희 신정동은 지역주민 대비 천주교 신자는 5.6%입니다. 60대 초반분들에게 할머니라면 뒤지게 혼나죠. 어르신들이신데 주일 성당 미사에 못 오실 때가 참 많습니다. 직장 다니신다고 해요. '직장'이라고 말씀하시는 데, 자세히 여쭤보지는 못합니다. 그 중에는 목동, 목5동, 양천성당 관할 지역에서 애를 봐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점잖게 말한 것이고, 가사도우미일 수도 있죠.
그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3계명을 지키는 것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인데, 그 시간이 되면 어떤 지역의 성당들은 동네 주변의 교통이 마비됩니다. 이 교통이 마비되고, 어떤 지역분들은 그분들을 위해서 그곳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상황입니다. 이것은 제3계명의 사례이지만,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은 필요와 어떤 경제적 이유로 주님을 찬미하지 못한다면 그런 이들을 돌봐야 하는 것이 바로 3계명입니다.
2014.12.2(화) 오후 8시 40분경, 전민동성당에서 특강중인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님
가톨릭 교리서에 담긴 진실
이런 계명들이 십계명 안에 있습니다. 도둑질은 경제에 대한 얘기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전쟁의 금지, 군비축소의 이야기입니다. 양심의 이유로 가장 약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군복무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죠. 통상 양심적 병역거부라고 합니다. 병역을 거부하는 것인데, 가장 약한사람이 선택하는 수단이 됩니다. 오로지 내 몸뚱아리로 방어수단을 찾는 것이죠. 손에 각목이나 칼을 들고, 창이나 총을 들고서 뭔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맨 몸으로 폭력에 맞서는 것이 바로 '비폭력'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진정한 공동체라면 다른 방어수단을 마땅히 찾아줘야 한다는 것이 가톨릭 교리서에 들어 있습니다.
얼마전 로마 주교대의원회가 있었는데, 사달이 나고 해프닝이 있었죠. 가톨릭교회가 동성애 사람들에게 어떻게 한다는 식의 얘기가 논란이 되었죠.
가톨릭, 동성애. 이혼 포용 시사 ... "혁명적 변화"(종합) ... 연합뉴스 2014.10.14
동성애, 보수 가톨릭 넘지 못했다... 시노드 최종 보고서에 포함 안돼 ... 서울신문 2014.10.20
십계명 가운데 간음하지 말라는 조항에 가면 이 얘기를 풀어놓고 있습니다. 지난 교리서는 언급조차 없습니다. 새 교리서. 거기에는 동성애 자체에 대한 평가가 실려있습니다. 유보적입니다. 잘 모르겠다는 것이죠. 왜 이런 일이 생겼나 모르겠다. 그러나 교회 성경 가르침과 교회 전통에 따라 무질서한 것이라는 논리를 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있는 것이니 교회는 어떠한 차별의 기미도 보이면 안되고 따듯하게 맞이하고 하느님의 불리움을 받은이들로 대우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가톨릭 교리서에 있고 보신 분을 손 들으라고 말씀드리면, 제가 허구한 날 싸돌아다니는 데 없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본 분이 없으니까요. 괜히 나온 책이 아닙니다. 새교리서는이전에 1984년에 나온 겁니다. 그리고 십년에 걸쳐서 준비해서 1994년에 표준교리서로 나오고 재작년인가 작년인가에 이 교리서 출간 기념하며 새로운 교황이 신앙의 해로 기념한 것입니다.
참고글. 오늘 예수님이 오신다면 먼저 누구를 찾아가실까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 2012년 10월 23일 강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고 20년이 되었을 때, 이번의 회의처럼 시노드를 열었을 때 '공의회 정신 담은 새 교리서 만들자'라고 제안이 되면서, 당시 베네딕토 16세가 주무장관으로 10년에 걸쳐 만든 것입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열여섯 개의 문헌을 냈습니다. 그것은 성경보다 덜하지만, 성경 다음으로 교황과 레벨이 같은 권한을 갖습니다. 최고목자 수위권인 교황의 가르침, 윤리, 도덕 등 가르침에는 오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교황님 정도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진 교회기구가 공의회입니다. 4세기부터 최근까지 21번 있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마지막입니다. 가톨릭 교회를 다시 보게 만든 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입니다.
교회헌장, 사목헌장이라는것. 사목헌장 순서, 배열구조가 이것과 비슷합니다. 사목헌장은 교회가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 ... 우리가 만일 놀기만 하면 뭐라고 하죠? 배부른사람이라고 하죠. 그런 존재가 아니고, 밥을 먹는 이유는 학생은 학교가서 뭔가를 위해서 밥을 먹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 은총을 받았으면, 그 은총을 가지고 뭔가 하게 되어 있는거죠. 교회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닙니다. 도구이고 수단입니다. 뭘 하라고 하느님이 세상에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사목헌장의 일부는 인간의 존엄함과 인류공동체에 대해 언급합니다. 제목이 같고 내용도 비슷합니다.
사목헌장 [司牧憲章] ...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반포한 4대 헌장 가운데 하나.
2부는 긴급과제입니다. 위기에 처한 이 사회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주로 이것만 생각합니다. 혼인과 가정에 대한 것이죠. 그러나 저는 성가정이란 말 못쓰겠어요. 세례받은 부부는 차치하고, 아이들과 얘기할 때에도 굉장히 조심합니다. '아빠 어디 계셔?'라고 못 물어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분들일수록 가정 자체가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입니다. 공의회에서도 60십년대인데 교회의 시급한 과제 1번이 바로 혼인과 가정입니다. 그런데 2번부터 나가면 낯섭니다. 이건 또뭐야 하게 되는 것이죠.
2번째 경제문제
3번째 문화문제
4번째 정치문제
5번째 국제질서
6번째 평화문제
이 문제를 교회가 시급하게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고 써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새 교리서(가톨릭 교리서)는 이것은 십계명에 풀어넣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성령 얘기 별로 없고, 성사, 기도얘기 별로 없고, 맨 사람과 세상 애기입니다. 가톨릭 교리서에 들어와 있는 것인데, 그것을 사회교리라고 해서 빼놓으면 안되는 것이죠. 우리 세상의 경제와 정치, 평화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고 했을 때, '왜 교회가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갖지?'라고 의구심을 갖거나 그건 교회에서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문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 바로 '간추린 사회교리'입니다.
이것도 잘라서 다닙니다.(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인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님은 전국 특강을 다닐 때에 책의 무게때문에 책을 분철해서 다닌다고 소개하고 있음. 먼 곳을 방문할 때는 분철한 자료를, 가까운 곳은 두터운 책을 그대로 갖고 다닌다는 언급이었음)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가 2004년에 펴낸 "간추린 사회 교리"는 곧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천주교회가 지난 한세기 이상 사회 문제에 대하여 신자들에게 체계적으로 제시해 온 가르침의 핵심 부분을 일목요연하게 엮어 놓은 것입니다.
사목헌장과 가톨릭 새 교리서의 순서를 닮아서 첫번째는 인간존엄성과 공동체 그 안에서 원리들을 말하고 있으며, 뒤에 가서는 가정과 혼인, 그리고 생태문제 즉 환경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상세목차
교황청 국무원장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 서한 서문: 통합적이고 연대적인 인도주의
- 가. 제삼천년기의 여명에서
- 나. 이 문서의 의의
- 다. 인간에 대한 충만한 진리에 봉사
- 라. 연대와 존중과 사랑의 표징 안에서
제1부
제1장 인류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계획
- I.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느님의 해방활동
- II. 성부의 사랑의 계획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 III. 하느님 사랑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 IV. 하느님의 계획과 교회의 사명
제2장 교회의 사명과 사회 교리
- I. 복음화와 사회 교리
- II. 교회의 사회 교리의 성격
- III. 우리 시대에 교회의 사회 교리: 역사적 특징
제3장 인간과 인권
- I. 사회 교리와 인격주의 원리
- II. "하느님의 모습" 인 인간
- III. 인간의 여러 모습
- IV. 인권
제4장 교회의 사회 교리 원리들
- I. 의미와 일치
- II. 공동선의 원리
- III. 재화의 보편적 목적
- IV. 보조성의 원리
- V. 참여
- VI. 연대성의 원리
- VII. 사회생활의 근본 가치
- VIII. 사랑의 길
제2부
제5장 사회의 기본 세포인 가정
- I. 최초의 자연 사회인 가정
- II. 가정의 토대인 혼인
- III. 가정의 사회적 주체성
- IV. 사회생활에 적극 참여하는 가정
- V. 가정에 봉사하는 사회
제6장 인간 노동
- I. 성경의 관점
- II. "새로운 사태"의 예언자적 가치
- III. 노동의 존엄성
- IV. 노동의 권리
- V. 노동자의 권리
- VI. 노동자들의 연대성
- VII. 노동계의 "새로운 변화"
제7장 경제생활
- I. 성경의 관점
- II. 도덕성과 경제
- III. 개인 주도와 기업주도
- IV.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경제 제도
- V. 경제 분야의 "새로운 변화"
제8장 정치 공동체
- I. 성경의 관점
- II. 정치 공동체의 토대와 목적
- III. 정치 권위
- IV. 민주주의 제도
- V. 시민 사회에 봉사하는 정치 공동체
- VI. 국가와 종교 공동체들
제9장 국제 공동체
- I. 성경의 관점
- II. 국제 공동체의 근본규칙
- III. 국제 공동체 기구
- IV. 발전을 위한 국제 협력
제10장 환경 보호
- I. 성경의 관점
- II. 인간과 피조물의 세계
- III. 인간과 환경의 위기 관계
- IV. 공동 책임
제11장 평화 증진
- I. 성경의 관점
- II. 평화: 정의와 사랑의 열매
- III. 평화의 실패: 전쟁
- IV. 평화에 대한 교회의 기여
제3부
제12장 사회 교리와 교회 활동
- I. 사회 분야의 사목 활동
- II. 사회 교리와 평신도의 참여 결론: 사랑의 문화를 위하여
사회교리란 특수한 관심영역인가?
이런 걸 통칭해서 사회교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관심있는 몇몇이들의 관심영역인가 아니면 보편교회, 가톨릭교회가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이 성당 안에서 하느님을 입으로 고백하고 성체를 영하고 기도한 다음에 문 밖에 나가서 그리스도인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말하는 겁니다. 그냥 교리입니다. 이 안을 일컬어 교회이고, 저 밖을 편의상 사회라고 하는 것이지만, 가정, 경제, 정치, 문화 더 나아가 국제도 사회죠. 그안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하는 겁니다.
유별난 이들의 영역이라고 말하는 건 한국교회가 보편교회인 가톨릭교회가 이것이 표준교리임에도 불구하고, 상당 부분을 이유는 모르지만, 원인은 뭔지 모르지만 외면해욌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 전 다녀 가신 교황은 세상과 사회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셨습니까? 교황님이 작년 7월에 당신이 교황 즉위한 다음에 교황청 밖의 공식적으로 미사를 처음 간 곳은, 그곳에서 미사를 봉헌하셨는데, 그 미사의 성격은 참회의 미사였습니다. 어디 가셔서 미사하시고 강론하셨는지, (10여분 짜리) 동영상을 보시고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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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e's Mass in Lampedusa: Don't give into the 'globalization of indifference'
바티칸 공식 유튜브 <람페두사의 미사> (2시간 28분 24초)
람페두사섬 Lampedusa Island
이탈리아 남부, 지중해의 몰타섬과 튀니지 사이에 있는 펠라기제도(諸島), 시칠리아섬에서 남쪽으로 205km
람페두사는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섬입니다. 불법 이민자들은 여객선 아니 어선같이 생긴 배에 승선해서 유럽을 향합니다. 그런데 돈이 좀 모자라면 배의 그물에 매달려서 지중해를 건넙니다. 람페두사는 이탈리아의 최남단에 자리한 섬입니다.(주민은 5,500여명) 그곳을 향하는 중에 어선같은 배는 뒤집히고 불에 타고 가라앉기를 수차례 반복했으며 여러차례 계속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 섬을 방문한 즈음에도 그러한 일이 있었지만, 문제는 몇 명이 죽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태연하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얼마전 <복음의 기쁨>이란 책을 내셨습니다. 일종의 '사도권고문'이죠. 본인은 그것이 회교리문헌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복음의 기쁨> 180항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세상(사회)에 도전합니다.
180. 성경을 읽어보면 복음(the Gospel, 기쁜 소식)이 단순히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복음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응답(이웃사랑)을 단순히 어려운 이웃 개인들에게 실천한 우리의 소소한 인간적 몸짓 정도로 보지 않습니다. 복음은 그 사랑의 응답을 "메뉴판에 적힌 사랑의 목록" 정도로 보지 않습니다. 복음은 그 사랑의 응답을 또 오직 우리의 양심을 편하게 하려는 일련의 행동 쯤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분명한 사실을 외면한다는 것은 '성경'을 개인의 취향에 따라 활용한다는 것으로, 이기적 생활을 신앙으로 정당화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복음은 명백히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루카 4,43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복음은 이 세상에서 통치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서 통치하시는 그만큼, 사회생활은 보편적 형제애, 정의, 평화 그리고 존엄이 실현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이 땅에서 드러나야 할 '하느님 나라'의 표지는 형제애, 정의, 자유, 존엄이라고 할 수 있다. 권고가 '배척의 경제', 불의한 '독재경제', 불평등과 빈곤의 구조, 폭력 등을 심각하게 다루는 이유는 그것들이 결코 '하느님 나라'의 표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교회의 생활은 모두 사회에 영향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오 6,33) 예수님의 사명은 당신 아버지의 나라를 이 세상에서 시작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오 10,7)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복음의 기쁨>은 권고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사도권고'라고 하니, 권고니까 명령이 아니구나. 그러하니 일단 안해도 그만일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런데 사도권고를 그렇게 이해하면 교회문헌에 대해 착오가 생깁니다.
사도권고가 의미하는 것
신약은 총 27권입니다. 그 중에서 복음이 4권, 사도행전, 맨 뒤에 요한묵시록, 이렇게 여섯권을 빼면 21권은 사도들의 서한입니다. 이 사도들의 서한이 모두 권고형식입니다. 개인이나 공동체에게 '우린 무엇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 생활해야 합니다'라고 권고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사도권고란 무거운 겁니다. 사도권고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182항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인데, 불확정의 상황들, 곧 변화무쌍한 현실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은 언제나 새로워지고 발전해야 하며, 또한 그 때문에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천주교 현실과는 좀 다릅니다. 우리 사회의 불확정한 상황들, 변화무쌍한 세상에 대해 교회는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대세죠. 제가 느끼기에는 ... 한국교회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위대한 사회원리라고 하지만, 우린 없죠. 뭔지 잘 모르죠. 인간존엄의 원리, 공동선의 원리에서 나온 재화의 보편목적의 원리, 사회적 약자 우선 원리, 연대의 원리 같은 것들... 바로 이것은 세상 바라보는 데 성찰기준, 판단기준, 행동기준이 됩니다. 그런 원리들이 있는데, 우린 사회와 관련된 원리라고 해서 한국천주교에서는 그다지 관심을 안가집니다.
2014.12.2(화) 오후 8시 45분의 전민동성당 2층 성전 모습
여기서 재화의 보편목적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든 있는 것들은 모든 이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상 소유권이나 처분권과 충돌합니다. 그러나 공동사용권이란 것이 있습니다. 모두가 함께 쓸 수 있도록 원주인인 하느님이 만들어 놓았다고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유권을 절대시하고 처분권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충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소유권과 거기서 나오는 처분권을 절대적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재화보편원리와 공동사용권을 말한다. 소유권은 재화의 공동사용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나만의 이로움이 아니라 모두의 이로움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공재라는 걸 만듭니다. 공기가 공공재일까요? 그렇죠? 물은 어떨까요? 점점 이상해지죠. 사먹어야하죠. 사먹어야 한다는 것은 구매력의 있고 없음에 따라 물에 대한 접근이 달라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꾸 절충형이 생깁니다. 공공재가 되려면 누구나 이용하게 하지만, 담을 쳐놓고 돈내라고 하는 사유재가 되는 것. 이게 간단한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정치적 과정이라고 합니다. 합의할 만한 과정이 필요한 것이란 거죠. 무조건 무엇은 무엇이라고 할 수 없죠. 사회는 살아있는 생물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교황은 복잡한 현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려면 실질적 결론을 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 목자들은 시람들의 삶에 영향 미치는 모든 것에 대한 의견을 밝힐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그 전에는 교회가 세상 안에서 거룩한 참 이슬만 먹는 고도였습니다. 더러운 세상과 얽히면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자체가 목적이 되고,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와야 합니다. 씻고 들어옵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천국이고 목적입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는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게 새로워졌습니다.
교회는 사회 안에서 하느님의 누룩이 된다.
교회는 사회 안에서 하느님의 누룩이 된다. 교회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구로 바뀐 것, 수단이 된 것입니다. 목적과 수단은 큰 차이가 있죠.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무엇인가를 위해 존재하게 됩니다. 내가 수단이 되면 목적을 위해 이용당하는 것인거죠. 수단은 가치중립적입니다. 목적에 부합하면 정의롭습니다. 본성에 부합.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정의는 본성에 부합한다는 것. 도구는 가치중립적. 목적에 부합하면 참 잘했어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구란 그렇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순례여정길에 오른 인류를 위해 샘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류가 가야할 길의 이정표가 되어야 합니다. 제대로 된 표지가 되어야 유익한 것입니다. 엉뚱한 열차 플랫폼에 서서 헤메이지 않도록 정확하게 안내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표지는 두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말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면 좋다고 알려주는 표지일 것입니다.
(박신부님의 유머) 최불암 선생님이 돌아갈 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혈당을 가지고 있는 데, 식구들이 다 놀러가고 집에 아무도 없는 겁니다. 순간 당이 갑자기 떨어져서, 눈은 흐릿해지고, 먹을 것을 막 찾다가 지하실에서 마침 먹을 게 있는거에요. 그게 통에 '단거' 라고 써있는거에요. (단거는 Danger를 뜻함)
도로 위험표지판이나 낙석주의 표지판 등이 조심해야 할 것을 알려주는 표지판의 사례가 될 것이고요. 그 중에서 가장 끔찍한 표지판이 뭘까요? 아마도 담벼락 가위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정도 표지판이면 효과 만땅입니다. 그것은 경고의 표지 중 가장 강력한 겁니다. 죄송합니다. 거룩한 성전에서... 이 길로 가면 참 좋습니다. 생명의 길 가르키는 표지도 있지만, 죽음으로 가는 위험표지도 있습니다. 인류가 발걸음을 옮길 것인지 말 것인지, 샘물이 식중독, 배탈나고, 먹자마자 뱉는 샘물일 수도 있습니다. 교황님은 그것을 비인간화의 길이라고 말하십니다.
복음의 기쁨에서는 배제를 토대로 하는 경쟁, 무한경쟁의 이 경제는 인류를 비인간화의 길로 간다고 경고하고 있죠. 또 하나는 심각한 불균형이 가져올 폭력을 경고합니다. 그래서 인류가 만일 순례하고 사막을 여행하는 데 표지기 제대로 된 표지면 저리로 가자. 모세나 아브라함 등의 구약 예언자들이 한 말은 딱 두가지입니다. 이리로 가면 죽는다, 산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사막의 샘물같고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일, 부정적 영향을 준 것인가를 표지를 내세워야 한다. 이론은 간단합니다. 교회가 도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도구가 수단이 아니나 그 자체의 목적이 되면 흉기가 됩니다. 실질적으로 이 이야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에서 가장 뼈저린 성찰이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2년부터 65년까지 있었는데, 그 이전에는 세계 대전이 있었고, 식민지가 있었죠. 유럽에서의 산업혁명, 사회주의 혁명, 도시화 등 16세기 이래로 300-400년간 교회가 대세였던 유럽대륙의 경험에서 얻는 교훈입니다. 공멸을 가져오는 대재앙의 대량학살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어디서 벌어졌나요?
그것은 심국지 같은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에서는 한번도 사용해 본 적 없고, 앞으로 사용해볼까 말까 고민스러운 핵무기를 써보았죠. 사람이 놀라는 거죠. 전쟁의 참화가 끝나자 마자 미국과 소련이 냉전을 통해 벌인 게 과학경쟁, 학문경쟁, 체제경쟁입니다. 이런 것 말고도 무기경쟁, 무력경쟁을 벌였습니다. 그 군사무기들의 파괴력이 지구행성 자체를 아예 없앨 수 있는 것이죠. 공포의 균형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요?
또한 2차 대전 이전에는 식민지가 있었습니다. 시장이 포화되면서 시장을 넓히려다가 충돌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탐욕의 결과였습니다. 그와 함께 식민지, 과학화, 도시화, 빈부격차 등으로 사회 내부현상이 벌어집니다. 바로 혁명이죠. 계급과 계급의충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고립된 섬에서 고고하게 유유자적하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쓴맛을, 처절한 맛을 본 것입니다. 유럽을 가보면 크디 큰 성당들이 많습니다. 이건 성당도 아니죠. 그 큰 성당이 지금 텅텅 비어있습니다. 유럽 교회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사람들 교만해서 그런가요?
교회에 대한 실망이 컸던 것입니다. 프랑스혁명 격동기에는 교회 성직자도 심하게 혼쭐이 났습니다. 교회는 도대체 뭐했나? 그 때 재산 몰수당해서 지금까지 돌려받지 못하고, 시민들이 세금 냅니다. 내가 내고 싶으면 냅니다. 이탈리아의 땅 3분의 1이 교황령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교회의 것이었지만, 뺐겼습니다. 바티칸에 들어가 살래, 이탈리아 떠날래 그랬던 것이죠. 그 나라 정부의 정치체제가 교회를 그렇게 대했을 때 시민들이 가만히 있으니 그것이 가능했겠죠. 양천구청장이 신정동 성당 내놓으라하고, 신자들이 박수 막 치고 저 혼자 울고 있는 꼴이죠.
세계대전의 참화는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핵무기는 공포입니다. 핵무기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데요. 히로시마에서 14만명이 죽습니다. 그 중 60퍼센트는 타죽습니다. 거기 몇백배의 플루토늄 핵무기는 나가사키에 떨어졌습니다. 7만명이 죽었습니다. 그것이 도심상공 아니라 산넘어 떨어지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유도장치가 있습니다. 3만기가 있다고 했을 때, 그 중 1400기는 발사 5분 대기조입니다. 그중 10개만 터트려도 지구는 빙하기에 들어갑니다. 교회는 그것을 겪었던 겁니다.
인류가 사람 사는 곳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교회는 응답해야 할 절박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1891년부터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느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낸 이유, 구세사. 세상을 구원하는 이야기지 우리가 천국가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온 것이죠. 우리가 가는 게 아니고요.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는데, 수많은 사람들, 교황님 말씀처럼, 사람들이 그러고 있는데, 문 밖에서 무수히 많은 이들이 교회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우린 문 안에서 '주님, 주님'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사제와 레위인의 위선입니다. 그걸 보고, 우릴보고, 교회를 보고 사제와 레위인의 위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길을 펴고, 아버지 뜻을 펼치는 이가 신앙인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이 자리에 모여 하느님께 구원을, 도움을, 은총을, 힘을 청하고, 하느님께서는 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그 힘으로 문 밖에 나가서 앞장서는 것이다. 사회교리는 그 도구이고 수단입니다. (끝)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 특강 @ 대전 전민동성당
2014년 12월 2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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