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이며,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으로 활동 중인
박상병 루도비코 신부의 경향잡지 8월호 기고 글입니다.
기회의 불평등과 교회
박상병 루도비코 신부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한다. 오히려 "개천에서 욕 나온다."라는 말이 자조적으로 쓰이고 있는 현실이다. 헬조선, 흙수저, 엔포세대 등의 표현들과 연결되어 있는 말이다.
한국전쟁뒤,사회를재건하면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성장 동력 가운데 하나는 높은 교육열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교육은 사회발전을 위한 도구이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도구가 된 듯하다. 사회 발전을 이끌면서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는 교육이기보다 양육강식의 사회 속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으려는 몸부림 같은 교육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학원에 가야만 하는 이유
어느 신부님이 본당에서 학부모들과 만남의 시간 중에 아이들의 사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부님은 부모들에게 사교육 대신 아이가 좀 더 뛰어노는 시간을 많이 마련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한 학부모가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 저도 그렇게 아이를 키우고 싶습니다.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학원에 보내지 않고, 뛰어놀게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얼마가지 못했어요. 이유는 함께 놀 친구가 없어요. 다들 학원에 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학원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라고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불과 20여 년 전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던 현상이다. 대학 입학시험을 앞둔 고등학생이 아니라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몇 개의 사교육 학원을 다니는 것이 아이들의 일상이 되었다. 사교육이 그리 큰 효과가 없다는 조사가 보고되어도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학원에 보낼 수밖에 없다.왜 그럴까?
그 밑바닥에는 불안감이 존재한다. 사교육의 효과를 떠나서 다른 아이들이 다 학원을 가는데, 우리 아이만 뒤처지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나중에 변변한 직업도 구하지 못해 제대로 먹고 살 수없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 그리고 불안의 기저에는 사회의 안전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중요한 이유가 된다. 한번 미끄러지면 나락으로 떨어져 결코 회복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세뇌되면, 사교육이 아이들에게 정말로 도움이 되는 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순간의 불안으로부터 먼저 탈피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 구조는 그것을 계속해서 부추기고, 그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불평을 털어 놓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순간의 불안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사회는 무엇을 위해 아이들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교육을 시키는가? 인격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훌륭하게 키우려는 교육은 이미 화석화되어 고전에만 존재하는 듯하다. 동시대의 다른사람과 비교하여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어버린 듯하다.
무엇을 위한 경쟁력인가? 결국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는 삶의 조건을 제공받을 수 있는 직업을 갖는 것이 오늘날 교육이 추구하는 목표가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어쩔 수 없다는 푸념과 함께 이미 공고화되어 버린 사회 구조 속에서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지 되물을 여유도 없이 앞만 보고 나아간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어린 학생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세대보다 더 뛰어난 이력을 쌓은 청년들이 변변한 직업을 갖고 사는가? 어렸을 때부터 경쟁이라는 구조 속에서 살아온 청년들에게 지불되는 것은 무엇인가? 단지 열정만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기회를 주었으니 돈 받을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인가?
신음하는 이들과 연대해야
자본주의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풀이할 수 있겠지만, 단순하게 ‘자본’이 우선이 되는 사조라고 할 수 있다. 이미 그 말속에는 다양하고 소중한 여러 가치 앞에 ‘자본’이 우선시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래서 ‘자본’을 위해 모든 구조가 정비되고, 사람은 그 틀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는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선출되고, 그의 로마 밖 두번째 사목 방문지는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사르데냐섬이었다. 사르데냐는 이탈리아에서도 다른 곳에 비해 청년 실업률이 굉장히 높은 곳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청년들을 위로하며 강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일자리가 없는 곳에 인간에 대한 존엄성도 없습니다.” 교종은 이것이 이탈리아 사르데냐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문제임을 상기시키시면서, 그 원인을 현재의 경제구조에서 찾으셨다. 곧 전 세계가 돈이라는 우상을 둔 경제체제를 선택한 결과라는 지적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돈이라는 우상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해나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윤리가 결여된 오늘날의 경제체제는 사람을 중심에 두지 않고, 돈이라는 우상을 중심에 두고 있다. 그래서 돈이라는 우상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쓰고 버려진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현재 경제체제 속에서 노인은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버려지고, 젊은이는 그들의 열정만 이용당한다. 인간 존엄성을 위한 최저임금이나 처우는 보장되지 않은 채 쓰이고 버려진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렇게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것을 폐기해 버리는 문화에 대해 우리 모두 “그만, 안돼.”라고 말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용기를 내어 희망을 만들어가자고 권고하신다.
그리고 공직자들이나 교회의 성직자들이 그저 미소만 지으며 용기를 내라는 말만 하지 않기를 당부하셨다. 양떼를 치는 목자처럼, 한 가정을 이끄는 가장처럼, 말만이 아니라 힘겨운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과 연대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기를 당부하셨다.
그렇다면 교회는 극심한 경쟁과 기회 불평등의 사회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교회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과 연결된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늘 위에서 팔짱만 낀 채 지켜보는 분이 아니셨다.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땅으로 내려오셨고, 우리와 똑같은 환경과 처지를 받아들이면서 사셨다.
육화는 단순히 인간의 가죽만 쓰신 것이 아니라,우리의 온 존재와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셨다는 것이고, 거기에서 사람에 대한 연민과 공감은 시작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사다. 그러므로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말이나 상징적인 선언으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극심한 경쟁과 기회의 불평등 속에서 헤매는 양들에게 교회는 과연 어떤 모습을 삶으로 드러내고 있는가? 영성이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참다운 영성이겠는가? 그 어느 세대보다 열심히 살려하지만, 참된 행복을 찾지 못하는 오늘 이 세대의 아픔과 절망을 교회는 가엾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되돌아 보아야 한다.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가엾은 마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교회는 예수님과 달리 이 땅이 아닌 구름 위에서 팔짱만 끼고 순간적인 위안과 현실을 도피하는 선포만 한다고 할 것이다. 가엾은 마음은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더욱 하나가 될 것을 요구한다.
사회의 구조적인 원인을 없애려면
다음으로 프란치스코 교종이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에 제안하신 것을 언급하고 싶다. 프란치스코 교종은「복음의기쁨」에서 이렇게 힘주어 말씀하셨다. “가난한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느님의 도구인 우리가 그러한 부르짖음에 귀를 막는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뜻과 그분의 계획을 거스르는 것이다”(187항).
프란치스코 교종이 교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지를 식별할 수 있는 기준으로 제시하신 것은 바로 ‘가난한 이들을 잊지 않는 것’이다. 교회가 언제나 복음의 아름다움을 적절히 드러낼 수는 없다 하더라도 결코 없어서는 안 될 하나의 표지는 바로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한 선택, 사회가 저버린 이들을 위한 선택’이다 (195항참조).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고자 교회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없애고 가난한 이들의 온전한 발전을 촉진하는 일이다 (188항참조). 교회의 사회교리는 세상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구조적인 악’이라는 표현을 쓴다. 오늘날의 문제가 개인이나 집단의 잘못된 판단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사회 전체가 서로 얽혀서 발생하는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구조적인 원인을 없애고자 하는 출발은 연대이다. 연대는 어쩌다가 베푸는 자선행위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경쟁에서 승리한 몇몇에게만 허락되는 재화의 독점을 극복하고 공동체 차원에서 모든 사람의 삶을 먼저 생각하는 새로운 마음가짐이 요구된다.
이를 실천하려면 재산의 사회적 기능과 재화의 보편적 목적이 사유재산에 앞선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이들의 자발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그래서 연대는 가난한 이들에게 속한것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결정으로 실천되어야 함을 프란치스코 교종은 강조하셨다 (189항참조).
이것이 바로 가난을 실천하는 교회의 모습이며, 목자들이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느님 백성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때 교회는 세상 속에서 소금의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참된행복
마지막으로 제안하고 싶은 것은 교회가 무엇을 참된 행복이라고 선포하고 있는지 되돌아 보는 일이다. 소비주의 사회에서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거나 더 많은 것을 소비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제시한다. 그래서 경쟁 속에서 결국 얻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요구대로 살 수 있게 해주는 조건이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행복이라고 가르치는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바로 복음이 제시하는 행복한 사람이다.
복음이 제시하는 행복한 삶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하지만 참된 행복의 이 조건을 우리가 마주했을 때 어떠한가? 솔직히 불편하지 않은가? 여덟가지의 행복, 말은 좋은데 살려니 참으로 불편하다. 불편함, 괜찮다. 그 불편함에서 출발하자.
‘가진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듣고 우울해했던 부자 청년 (마르 4,21-22 참조)부터 되어보자. 오늘날 교회가 해야 할 일의 근본적인 출발은 어쩌면 복음을 들으면서 불편함을 느끼는 일일 것이다.
복음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서 오는 불편함을 무의식적으로 버리려 하는 모습과 이러저러한 현실 속에서 어쩔 수 없다는 합리화를 내려놓아야한다. 그리고 불편함이 왜 우리를 찾아오는지 느끼고 바라보자. 불편함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아가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그렇게 하기 싫은데 어찌합니까? ’그런 마음이 생긴다면 솔직하게 기도하자. 그리고 성령께 청하자. 바로 그 불편함 너머에 있는 진정한 행복을 만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게 힘을 달라고 청하자. 그리고 작은 것부터 실천해보자.그럼 분명 복음의 기쁨이 우리를 찾아온다. 그 기쁨을 깨달은 이들을 통해서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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