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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강론과글

[20130707] 이곳은 골고타입니다 - 김유정 신부 대한문 매일미사 강론

by 편집장 슈렉요한 2016. 12. 23.

2013년 7월 7일


이곳은 골고타입니다

 

                                               김유정 신부 (대전교구 대전가톨릭대학교)

 

 

오늘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1821년 충남 솔뫼에서 태어난 김대건 신부님은 열여섯의 나이에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7개월에 걸친 긴 여행 끝에 걸어서 마카오에 도착하셔서 유학 생활을 시작하셨고, 스물다섯의 나이에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 서품되셨습니다. 이후 천신만고 끝에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 단 두 달간의 사목생활을 하셨고,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다가 붙잡혀 3개월간 옥살이를 하시고, 스물여섯의 나이에 군문 효수형을 받아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군문효수’란 목을 베어 군문 앞에 매단다는 뜻입니다. 만 25년 1개월의 짧은 생애였고, 9년에 걸친 유학생활 끝에 단 1년 1개월의 짧은 사제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건 신부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선포되셨습니다. 한국 성직자들도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더 효과적인 사목을 하려 하지 말고, 진리를 선포하다가 죽으라는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925년 7월 5일 복자품에 오르셨는데, 1949년 한국 성직자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시면서 축일을 7월 5일에 지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열아홉 살 이던 1839년, 조선에서 일어난 기해박해 때에 아버지께서 자신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처형되셨다는 가슴 아픈 소식을 해외에서 접했고, 사제 서품 전에 조선에 들어왔지만 어머니가 걸식으로 연명하고 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자신으로 인하여 또다른 박해가 일어날까 염려하는 마음에 상봉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다시 입국하여 어머니를 잠깐 상봉한 후 붙잡혀 감옥에서, 중국에 있던 동료 최양업 토마스에게 편지로 이러한 부탁을 하였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토마스여, 잘 있게. 이후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그리고 내 어머니 우르술라를 특별히 돌보아 주기를 그대에게 부탁하네.” 주교님께 보내는 그 다음 편지에서 다시금 이런 부탁을 드립니다. “저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떨어져 있던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만 만나보았을 뿐인데 또다시 갑작스럽게 잃고 말았습니다.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시기를 주교님께 간절히 바랍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마지막 편지들을 읽으면서, 사사로운 감정을 초월한 초인적인 영웅이 아니라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따뜻한 한 인간을 만납니다. 오로지 하느님만 찾고 영혼의 일만 생각하는 초월적인 인물이 아니라 어머니와 교우들의 안부를 염려하는 평범하고 따사로운 한 사람을 만납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고국에 오셔서 아무도 해친 일이 없고, 그 누구의 물건도 훔친 일이 없으며, 불량식품 제조 등 4대악에 해당하는 죄도 하나도 지으신 적이 없는데 붙잡혀 사형을 선고 받으십니다. 참 진리를 접했고, 오로지 그 진리를 전하려 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서양 선교사와 내통했다는 것이 그 죄목이었는데,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국가 보안법 위반’입니다. 국가의 안위를 위태롭게 할 목적이 결코 아니라 나라에 진리를, 진실을 선포하고자 했을 뿐이었는데, 국가가 그렇게 뒤집어 씌었습니다. 스물여섯 살 청년의 목을 베어 군문 앞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진리를 외치고 진실을 알리려하면 그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켜버리려 하던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관습이, 과연 오늘은 사라졌을까요. 오해받는 진실의 편에 서서, 국가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고,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에 대하여 합리적으로 판단해 주고 일부 국민들이 우리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를 풀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당신들에게는 불편하겠지만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외치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차라리 니네가 죽으라고 내 몰고 방치하는 부정과 불의의 권력이 과연 오늘날에는 참회를 한 것일까요.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대가로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좋은 약속 좀 해 주시지 왜 이런 약속을 해 주시나 모르겠습니다. 박해를 할 세력은 크게 둘인데 첫째는 세상의 권력입니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우리를 박해할 두 번째 세력은 가족으로 대표되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정작 우리 편이 되어 주어야 할 사람들이, 격려해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박해자들과 같은 논리로 무장하고 우리를 힘들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당신께서 겪으신 운명을 제자들도 비껴갈 수 없음을, 우리 또한 비껴갈 수 없음을, 진리와 정의와 생명의 편에 서면 부정과 불의와 죽음의 편에 선 세력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까지도 동원하여 우리를 괴롭힐 것이라는 예고를 가슴 아프게 하고 계십니다.

 

왜 열 두 군단을 하늘에 청하셔서 불의한 세력을 쓸어버리지 않으시나 모르겠습니다. 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소돔처럼 고모라처럼 인간의 존엄한 생명과 영혼을 무시하는 자본과 권력을 심판하지 않으시는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그 박해를 겪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진리와 정의와 생명의 편에 서서 박해받는 이들 안에 아버지의 영이 계시고, 아버지의 영이 활동하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영은 곧 예수님의 영이며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교를 없애버리려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을 박해하며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사울에게 예수님께는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예수님께서는 “왜 나를 믿는 이를 박해하느냐?”고 말씀하시지 않고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내 이름 때문에 박해 받는 이들 안에서 내가 함께 박해 받고 있다’, ‘지금 박해받는 이들이 바로 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을 좀 더 잘 묵상하기 위하여 굳이 비행기를 타고 이스라엘을 가서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대한문 밖에서 박해받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곳이 바로 골고타 언덕이고 철거된 분향소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깔고 앉으려고 마련한 은박지마저 빼앗기는 것이 예수님의 옷벗김이며, 강제로 철거하면서 비웃는 소리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어디 십자가에서 내려와보라’고 비웃는 로마 병정들의 비웃음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곳을 머리를 흔들며 지나가고, 어떤 이들은 이곳에 와서 참회를 하며, 어떤 이들은 이곳을 박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말씀이 매일 이곳에서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신 말씀처럼 우리 주위를 둘러선 이분들이 우리가 돌봐주어야 할 아들들이고, 이분들이 우리가 돌보아 주어야 할 어머니들입니다. “목마르다”하고 말씀하신, 진리와 정의에 목마르신 주님의 갈증이 이곳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다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신,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죽음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아직도 이곳에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 하신 기도가 우리의 기도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명령에 따라, 양심의 판단은 접어둔 채 이곳을 훼방하고 철거하는 경찰과 공무원 아저씨들 역시 또 다른 노동자들이면서, 앞으로 자신들도 비슷한 운명을 당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군인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셨지만, 그러한 명령을 내린 빌라도나 헤로데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명령을 수행하는 이들의 무지함은 참회와 속죄로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작 얼굴도 보이지 않으면서 그러한 명령을 내리는 이들의 용서는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당신의 수난 앞에서 참회하는 이에게 하신 약속은 지금 이 자리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아버지께 봉헌합니다.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일곱 말씀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이렇게 당신의 아들딸들이 모질게 수난 당하고 박해 받고 있는 현실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하느님에 대한 원망과 항변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없는 허공에다 대고 ‘내가 헛수고만 하였구나! 괜한 일로 인생을 허비하였구나!’라고 독백을 외치시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듣고 계심을,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조차도 그분께서 듣고 계심을, 그리고 그분은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이 상황을 가장 가슴 아파하고 계시는 아버지이심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아버지께서 이분들의 외침을, 우리의 외침을 남김없이 듣고 계십니다. 듣고만 계신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외치게 하고 계십니다. 버리신 것이 아니라, 버림받은 사람과 함께 하시기 위해 몸소 버림받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께서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깨닫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지금 직접 이 미사를 봉헌하고 계시고, 그분께서 이곳에서의 매일의 노고와 수난을 당신의 살과 피에 담아 희생 제물로 봉헌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일생의 대부분을 노동자로 보내신 나자렛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언제가 끝일까요? 언제 끝이 날까요?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끝은 분명히 있습니다. 진실과 정의가 승리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천천히 오고 더디 와서 오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날은 오고 있습니다.

 

성문 밖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수난이 바로 이곳 대한문 밖에서 매일 재현되고 있습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덮여 있는 우리 앞의 화단이 바로 예수님의 무덤입니다. 그렇다면 부활도 이곳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아멘.


2013년 7월 7일자 대한문앞 매일미사의 모습


PHOTO & NEWS Links

  1. 사진. [20130707 사진] 대전 정평위 김유정 신부 등 대한문 매일미사 주례
  2. 뉴스. [20130707] 대전 정평위 김유정 신부 대한문 매일미사 주례 등 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