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6일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촉구 시국미사 강론
김용태 마태오 신부 강론
(루카 10,25-37)
김용태 (마태오) 신부
†. 찬미 예수님!
“안녕하세요? 정말 안녕하세요? 아니, 요즘 같은 세상에 어떻게 안녕들 할 수 있으세요?”
기억하십니까, 이 말?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말! 작년 12월에 어느 대학생의 대자보로 시작해서 전국적으로 퍼져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말입니다. 철도 민영화에 반대하던 이들에 대한 직위 해제, 국정원의 불법 대선개입, 밀양사태 등 결코 안녕할 수 없는 대한민국에 대한 성찰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때로부터 벌써 10개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정말 끔찍스럽게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좋아지기는커녕 안녕하냐는 인사말이 오히려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형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문득 무서운 옛날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어떤 사람이 산에서 길을 잃어버려서 한참을 헤매다가 불빛 하나를 발견합니다. 불빛을 향해 걸어가 보니 조그만 초가집이 하나 있지요. 문을 두드리니 어느 할머니 한분이 내다봅니다. 산에서 길을 잃어서 그러니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부탁을 하지요. 할머니는 친절하게 쪽방 하나를 내어줍니다. 나그네는 감사의 인사를 하고 쪽방에 누워 잠을 청합니다. 그런데 얼마쯤 후에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립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밖을 내다보니까 아까 그 할머니가 야심한 밤에 칼을 갈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할머니 치마 밑에서 아홉 개의 여우꼬리가 보입니다. 혼비백산한 나그네는 그 집을 뛰쳐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참을 도망칩니다. 그렇게 한참을 도망치다가 다시 불빛을 발견합니다. 그 나그네는 이제는 살았다 생각하고 그 불빛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자 아까 그 할머니가 방에서 나오면서 말합니다.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겨?”
사람들이 정말 무서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이처럼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고통의 굴레이지요.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도망칠 수 없고 다시금 어김없이 반복되는 수많은 참극들, 그것은 그 자체로 절망이고 공포입니다. 서해훼리호 참사, 성수대교 참사, 삼풍백화점 참사, 씨랜드 참사, 대구지하철 참사, 경주리조트 참사, 그리고 세월호 참사! 이루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참극들이 끊이질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을 싫어합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고통을 선택하기도 하지만 변태가 아닌 이상 고통 그 자체를 즐기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도망치려 해도 도망쳐지질 않고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지질 않습니다. 피하고 싶지만 자꾸 따라옵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이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을 성서는 매우 역설적인 차원으로 설명합니다. “고통을 피하지 말고 직시하라!” 이것이 성서가 전하는,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끔찍스러운 고통, 떠올리기도 싫은 고통의 기억들이지만 그러나 고통은 잊어버리고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고 극복해내야 할 것이라는 겁니다.
모세와 함께 에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자기들을 구해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불만에 가득 차 불평만 해대더니 급기야는 에집트 종살이를 그리워하기까지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 배은망덕한 백성들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형벌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게 되자 그제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모세를 시켜 그들을 다시 살려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살려주시는 방법이 참으로 묘합니다. 우리말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끔찍스런 기억들은 떠올리기도 싫고 그것을 연상케 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느님은 모세를 시켜 그 끔찍스런 불뱀 모양을 똑같이 만들어서 기둥에 매달아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다보게 하라고 지시하십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뱀 형상의 그 구리뱀을 보고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은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실 때 하필 그 끔찍스런 불뱀 모양을 다시 쳐다보게 하셨을까요?
바라봐야 했던 겁니다. 그 고통을! 피하고 잊어버려서는 안 되고 그 고통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봐야 했던 겁니다. 불뱀 형상의 구리뱀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린 자신들의 죄, 감추고 싶은 그 죄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도 없는 배신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자기들을 살려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도 보았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구리뱀을 바라보면서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게 되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그 고통의 원인이 되는 자신의 죄와 그 고통을 넘어서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인간의 죄와 그로인한 고통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께 대한 오롯한 믿음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이스라엘 신앙의 중요한 근간을 이루고 결국 그들이 기나긴 세월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어 주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고통이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합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광야의 구리뱀이 십자가의 예표로 이야기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세상의 모든 고통이 다 달려있는 것 같은 예수님의 그 십자가! 바라보기 편하십니까? 불편합니다. 사실은 쳐다보기 싫습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자꾸 네가 지고가라고 손짓하는 것 같아 더 싫습니다. 그러나 바라봐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기에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못 박아 버린 우리의 죄가 드러나고 우리의 죄가 만들어낸 세상의 무수한 고통들이 드러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고 살리시는 하느님의 구원이 드러나고 그 사랑과 용서에로 우리를 초대하시 하느님의 부르심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똑바로 바라보면서 우리 죄에 대한 참된 통회와 서로를 살릴 수 있는 참된 사랑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뉘우치고 사랑하고 살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과연 고통이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것이 고통의 신비요 고통의 역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수많은 참상들을 덮어버리고 기억에서 지워버리려 해서는 안 되고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봐야 합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왜 이런 일이 있어났는가 냉정히 성찰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세월호는 이 시대의 십자가입니다. 거기에는 수백 명 무고한 아이들을 차갑고 어두운 바닷물 속에 수장시켜 버린 자들의 끔찍스런 죄악이 담겨 있고, 그러한 만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을 지지하거나 그들의 악행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이들의 죄악이 담겨 있고, 가족을 잃고 비탄에 잠겨 있는 이들을 위로해주기는커녕 그들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이들의 죄악이 담겨 있고, 이런 현실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무관심이라는 죄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죄 없이 죽어간 아이들의 죽음과 그 아이들과 함께 죽어버린 유가족의 슬픔과 그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고 계시는 착하신 예수님의 흐느낌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우리의 뼈를 깎는 참회와 서로를 살리는 사랑을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애절한 호소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서 눈감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희생자와 가족들의 울부짖음에 귀 막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에 대해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세월호라는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가야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러한 노력들을 방해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다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하자고! 아픈 기억 끔찍한 기억들 이제는 지긋지긋하니까 그만하자고! 그러면서 고통을 직시하고 고통을 극복해내려는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심지어는 진실을 덮어버리려고 조작과 왜곡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해서는 안 될 일까지 저지릅니다. 유가족들의 가슴에 이중 삼중으로 비수를 꽂아대는 겁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요? 뻔합니다. 그것은 세월호의 고통을 바라볼 때 그 속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자신들의 죄악과 허물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서일 것입니다. 돈과 권력이 최고라고 하는 이 시대의 썩어빠진 가치관, 온갖 비리와 부조리를 정당화 시켜주는 그 가치관이 적나라하게 파헤쳐져 드러나는 것이 불편해서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잊어라, 덮어라, 피하라 말합니다. 국민들에게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 외칩니다. 그 끔찍스러운 ‘세월호 안내방송’이 대한민국 전역에 울려 퍼집니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국민들을 도탄에 빠뜨리는 독재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이들의 전형입니다. 고통의 기억을 망각케 하고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게 만듦으로써 오히려 고통에 대해 저항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게끔 만들어버립니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독재와 폭력을 더욱 공고히 해나갑니다.
그래서 이 시대 여전히 현실의 부조리와 거기에서 오는 고통을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수많은 방법들이 총동원됩니다.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는 온갖 향락산업들, 선정적이고 음란한 방송들, 영혼 없는 웃음만 가득한 수많은 오락프로그램, 그 바닥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도 없는 수많은 막장드라마들이 사람들의 정신 줄을 빼놓고 이 시대의 부조리와 고통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러나 심각한 병에 걸렸음에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도록 계속 진통제만 투여해대면 결국 죽고 맙니다. 고통스럽더라도 그 아픈 부위에 칼을 들이대야만(수술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아파도 불편해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래야 건강해 집니다. 그것이 결국 고통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칼 구스타브 융이라고 하는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신경증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대가다.”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 직시하고 극복해내야 할 고통을 외면하고 피해버렸을 때 그 결과는 신경증 즉 노이로제와 같은 정신질환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집단 신경증에 빠져버린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시대의 고통, 이 시대의 십자가를 외면하지 말고 직시하고 극복해내야 합니다.
세월호는 또한 이 시대의 강도만난 사람입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사랑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고통을 외면하고 피해 지나가는 사제도 있고 레위인도 있습니다. 괜히 관심 갖고 다가가 봤자 불편하고 고생스러울 뿐이기에 도망치듯 달아납니다. 하지만 착한 사마리아 사람도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사람취급도 안했던 그 사마리아 사람이 다가갑니다. 고통의 한 가운데로 다가가서 그 고통을 감싸고 치유해 줍니다. 수고로움과 불편을 기꺼이 감내하면서 적지 않은 시간과 돈까지 내어줍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신분에서 올 수 있는 괜한 시비와 오해의 위험까지 감수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기꺼이 강도만난 사람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모두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세월호라고 하는 이 시대의 강도만난 사람은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 하시는 이 시대의 예수님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호소하십니다. 불편해도 지긋지긋해도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제발 당신을 불쌍히 여겨 도와달라고 호소하십니다.
이 호소에 동참합시다. 세월호라고 하는 십자가를 다함께 지고 갑시다. 세월호라는 강도만난 사람을 기꺼이 돌봐 줍시다. 그래야 우리는 세월호를 극복해낼 수 있습니다.
이 시대 가난한 이들의 가난한 아버지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오늘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고 고통 받는 이들과 늘 함께 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이 가르침과 하나가 됩시다. 그래서 좀 힘들어도 좀 불편해도 좀 지겨워도 세월호라는 십자가를 외면하지 맙시다.
우리가 이렇게 미사를 봉헌하면서 함께 하고자 하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은 이 시대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십자가를 지는 중요한 한 걸음이 될 것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뭘 더 주저하겠습니까? 우리 다 같이 그렇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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