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11일(금)
헌정질서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천주교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시국미사 강론
임상교 신부
1%도 안되는 잡것들이 99%의 국민들을 감시하고 조롱
도저히 강론을 쓸 수가 없었다
정평위원장 신부님으로부터 강론 부탁을 받고 나서, 강론을 그렇게 쓰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강론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오랜 시간 사제생활을 한 것은 아니지만, 강론을 이렇게 쓰기 어려웠던 것은 아마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론 쓰는 것을 멈추고, 왜 이렇게 어렵나? 하고 생각하고, 제 내면의 감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제 내면의 감정에서 올라오는 느낌, 그것은 모멸감이었습니다. 그 모멸감이 이성의 움직임을 막더라고요. 하느님의 고귀한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믿는 그래서 자유의지를 따라서 살고 있다고 믿었던 내 스스로의 삶 전체가 그 단 몇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부정되고 부인되는 현실을 바라보니, 따른 어떤 것에도 비교할 수 없는 모멸감이 밀려왔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아무런 느낌이 없으셨습니까?
1%도 안되는 잡것들이 99%의 국민들을
그래도 필요한 자료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끄적끄적 글을 썼습니다. 그 내용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느님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조소와 멸시를 담은 웃음입니다. 1%도 안되는 잡것들이 99%의 국민들을 감시하고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가지고 놉니다. 분하고 억울합니다. 그리고 생각났습니다. 얼마 전 교육부 고위관료란 사람이 했던 말, 국민은 개와 돼지와 같다. 적당히 먹을 것을 던져주면 그만이다. 개와 돼지로 여겼던 국민, 때문에 그들은 개와 돼지로 생각되어진 국민들을 보호할 의무가 없었던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래서 300명이 넘는 아이들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라면 구했을텐데, 개와 돼지와 같기에 그저 소비되면 소비할 수 있는 자원에 불과하기에 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개돼지와 같기에 물대포를 정조준해서 쏘고
국민이 개와 돼지와 같기에 물대포를 정조준해서 쏘고, 쓰러진 백남기 농민의 가족과 그 사람들에게 잔인한 꾀임을 벌였던 이유도 그들에게 국민은 사람이 아니라 개와 돼지였기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개와 돼지로 사는 국민, 그렇게 바라보는 집권자,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할까요? 우리 삶과 우리 삶의 질을 더욱 더 드높게 만드는 걸 원할까요? 아니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로봇을 원할까?
"부자되세요!"란 덕담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
그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내가 주니, 너희가 살고, 그러니 내가 죽어라 하면 너희는 죽어야 한다. 너희는 사람이 아니라, 내 자신이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이고 자원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지난 10년, 아니 8년 2개월이란 시간을 돌아봤습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가? 어느날 우리 사회에 갑자기 이런 구호가 불기 시작했습니다. "부자되세요!" 사람들이 '부자되세요!'를 연말 인사와 새해 인사로 나누게 되었을 때, 갑자기 어디에선가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부자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파트 값을 올려서 여러분은 부자가 될 수 있고,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땅 값을 올려서 여러분은 갑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를 여러분을 지배할 수 있는 대통령으로 뽑아주십시요!" 그 말에 우리는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됐습니까? 그의 집권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강이 죽어나갔습니다. 비정규 노동자의 모습이 너무 많이 증가했습니다. 재개발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가난한 사람들이 불에 타 죽고 삶의 터에서 쫓겨났습니다. 불평등은 심화되었습니다. 그들은 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원 없이 돈을 써봤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 사회는 이른바 '헬조선'이 되어갔습니다. 밑바닥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아버지를 잃은 불쌍한 여자, 반신반인이라고 칭해지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나무자비조화불을 외우면서 스스로를 미륵, 원세경이라고 부르는 자 바로 그런 교주에 사로잡힌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택했습니다.
혼을 정상화시킨다는 다양한 시도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 어떻습니까? 혼을 정상화시킨다고 국정교과서를 강제합니다. 국립공원에 케이블카를 설치하고자 합니다. 광화문 광장에 박정희 동상을 세우고자 합니다. 해군기지를 세우고 그리고 성주에 사드 기지를 만들려고 합니다. 평택에서부터 성주 제주, 우리나라 전역이 이제 전쟁 가능지역으로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집단 최면의 사회
지난 시기 집단최면에 걸린 한국사회의 오늘의 모습! 더욱 더 참담합니다. 지난 3년 10개월 동안 대통령이 누구인지 모르고 살았다는 현실이 너무 부끄럽고 아픕니다. 뉴스에서 보았던 그 사람이 대통령인 줄 알았는데, 그가 대통령이 아니랍니다. 그를 조종하고 움직였던 다른 사람이 있었답니다. 실제적인 힘을 행사하는 대통령이 따로 있었답니다. 그들이 내놓은 정책에 대해서 토론하고 나누면서 때로는 광장에 나가서 이것은 아니라고 외쳤는데, 그 모든 일들이 다 헛지랄이었습니다. 그가 만들어낸 정책이었다면, '이건 아니다.'라고 외치면 그는 들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아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가 대통령이 아니었기때문입니다. 도대체 어느 분야까지 최순실이란 이름이 개입되지 않았는지 찾아내기가 어렵습니다. 경제, 문화체육, 이제는 국방과 안보까지도 개입되었다는 의혹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최태민 일가를 위해 존재하는 나라, 지난 시간 우리 국민은 최태민 일가를 위한 종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세금을 낸 줄 알았더니 그들에게 복채를 내고 있었습니다.
일하다 죽은 노동자 위로금은 500만원?
재벌들은 어떻습니까? 회사에서 일하다가 죽은 노동자에게는 500만원 주기가 아깝다고 하면서, 최순실 딸에게는 수십억을 지원합니다. 정경유착입니다.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역사가 그 딸에게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시와 행시에 합격한 소위 '배운 놈'들이라는 환관들을 자신의 분신 옆에 포진시키고 정치를 대신하는 강남 아주머니의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박근혜 또는 최순실로 그 얼굴과 모양만 바뀌었을 뿐, 그들은 한 몸통에 두 얼굴을 지닌 쌍두사였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합니까? 실질적으로 대통령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지키려 하는 그에게 우리는 내려오라고 얘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러나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존재하지 않는 영웅을 기다리는 사회
지난 한국사회는 슈퍼맨을 기다리던 사회였습니다. 영웅을 기다리는 사회였습니다. 나라가 어렵고 힘들 때,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어떤 영웅이 나타나 악인들을 쳐부수고 나에게 평화와 안녕을 주기를 기원하고 바라던 그 때, 바로 그 시대 - 바로 그것이 우리나라의 모습이었습니다. - 그런데 영웅은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웅을 기다리는 사회에서 시민들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순결한 피해자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누가 공격하면 도망치면서 그저 "살려주세요!"만 외치면, 그리고 문을 닫아걸고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순결한 피해자,그래서 언제나 영웅만 기다리는 사람, 그리고 거기에 멈추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될 뿐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영웅이 없습니다. 누가 영웅입니까?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가 사실 영웅이 되어야 합니다.
악마가 곁에 없어도 스스로 악마가 되는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인이 되기 위해서 악마를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악의 경향성은 인간 스스로가 악을 선택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악을 선택함으로써 주어질 수 있는 유혹의 달콤함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스스로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자들이 선택하는 유혹! 매력적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다는 그 힘, 그 힘에 대한 욕망! 그들 스스로가 신이 되고자 하는 욕구, 바로 거기에 인간은 스스로 악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맹목과 배운 놈들의 기회적 편승은 악을 확대시키고 재생산시킵니다.
예수를 유혹하는 악마는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유혹하는 악마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빵과 굴종이 주는 권력과 권력이 주는 교만, 악마는 예수께 바로 그것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시죠. 그런데 성경을 보십시요. 악마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악마는 다음의 기회를 바라보며 예수에게서 떠나갔다.”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올 수 있는 이야기란 뜻입니다. 어느 누구도 악마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악마를 환영하거나 영합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건강한 삶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악에 맞서 싸워야 되고, 선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연대를 통해서 선의 힘을 확장시키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에드먼드 듀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것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하지 않았습니다. 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르신들은 우리 아이들한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앞에 나서지 말고, 뒤에 쳐지지 말고, 중간만 해라!"
하느님 자비는 정의에 기초해야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를 전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느님 자비는 정의의 기초 위에서 선포되어져야 한다. 곧 하느님의 자비는 정의가 실현되는 자비입니다. 오늘 교회는 자비를 살아가기 위해서 불의에 맞서는 역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교황께서 말씀하셨듯이,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불의 앞에 중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교회는 중립을, 중용을 지켜야 되지 않느냐고. 그런데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중용과 중립이 양다리를 걸치는 것인지. 중용이라 함은 옳음을 실천하기 위한 바라봄이며 투신을 위한 잠시의 머무름입니다. “선택을 위한 멈춤” 그것이 곧 중용입니다. 그것을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보아라!” 제자들은 가서 보았고, 예수를 위한 투신의 선택을 하였고,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교회는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바라보았으니 이제 움직여야 합니다. 교회는 우주의 어느 한 공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 사이에 자신의 거처를 위치시키고 정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가 걸어야 하는 길이 바로 인간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인간의 삶의 상태에 예민해져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 백성의 현실은 곧 교회의 현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가 현존하는 그 시대 속에서, 몸과 정신 모든 것을 써서 살아야 되고, 그 시대의 필요에 맞게 살아야 됩니다.
이 시대가 정의를 원한다면 교회는 정의를 선포해야 하고, 이 시대가 교회의 희생을 원한다면 교회는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길을 걷자
한국사회에서 지금 우리가 외치고 하는 이 외침은 하느님 나라의 확장과 완성을 위한 것이란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외침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이익을 얻거나, 어떤 이익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또한 상대방을 단죄하거나 죽이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정의에 기반한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함으로써, 악을 저지른 사람들을 향해서 회개의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은 우리가 해야 되는 애덕의 실천과 같습니다.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움직입니다. 그리고 외쳐야 합니다. 이것은 아니라고! 삶의 형태를 바꾸라고! 옳음을 위해서 숨겨진 것을 드러내라고!
오늘 미사 중에 함께 우리사회가 건강함을 위해 기도하면서, 오늘 길 위해서 함께 하느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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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2. [20161111 사진②] 대전정평위, 주교좌 대흥동성당 시국미사 후 촛불 행진
- 사진1. [20161111 사진①] 대전정평위, 헌정질서와 민주주의 회복 위한 시국 미사
- 강론. [20161111] 임상교신부강론. 맹목과 식자의 기회적 편승이 악을 확대시켜
- 영상. [20161111] 임상교 신부 강론영상. 1%의 잡것들이 99%를 농락한 국정농단
- 영상. [20161111] 뉴스영상. 헌정질서와 민주주의 회복위한 대전 정평위 시국미사
- 선언문. [20161111] 헌정질서와 민주주의 회복위한 대전교구 정평위 시국 선언문
- 뉴스. [20161111] 대전정평위, 헌정질서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국미사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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